[시선집중] “희생자 추모 공간이 혐오시설? 대통령부터 2차 가해하니 막말 너무 쉽게 나와”

2023. 12. 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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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일송 씨 (10.29 참사 희생자 함영매 오빠)>
-동생과 단 둘이 한국살이.. 10년 만에 처음 놀러 간 축제에서 참변
-활발하고 애교 많았던 조카, 엄마 잃고는 울 때도 어른 눈치 봐
-유가족 협의회,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이제는 특별한 가족.. 많은 위로
-희생자 추모 공간이 혐오시설? 159명 희생됐는데 무책임한 막말 이해안 가
-대통령 뇌진탕 운운 2차 가해, 총리 3차 가해, 장관 4차 가해.. 막말 너무 쉽다


■ 방송 : MBC 라디오 표준FM 95.9MHz <김종배의 시선집중>(07:05~08:30)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함일송 씨 (10.29 참사 희생자 함영매 씨 오빠)


☏ 진행자 > 오늘 이야기 나눌 분은 희생자 함영매 씨의 오빠 함일송 씨입니다. 나와 계시죠?

☏ 함일송 > 예.

☏ 진행자 > 함께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신 지 10년 정도 되셨다고요?

☏ 함일송 > 예, 10년 조금 넘었어요.

☏ 진행자 > 언제 한국에 오신 거예요? 정확히.

☏ 함일송 > 저는 2014년도에 왔고요. 제 여동생은 한 1년 2년 정도 더 빨리 왔거든요.

☏ 진행자 > 그래요. 한국에 남매 되시는 두 분께서 서로 의지하고 사셨던 거네요.

☏ 함일송 > 예, 그렇죠. 저희 어렸을 때 엄마를 먼저 보내고 후에 아빠도 보내고 남매로 살아남았죠.

☏ 진행자 > 다른 형제분은 또 안 계세요?

☏ 함일송 > 예, 없어요.

☏ 진행자 > 아이고. 그럼 혼자되신 거예요? 선생님.

☏ 함일송 > 고아가 된 거죠. 혼자 됐어요.

☏ 진행자 > 아무튼 1년이 좀 지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오셨어요?

☏ 함일송 > 1년 동안 저도 어떻게 지내왔는지 잘 생각 안 나고요. 그냥 사는 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 진행자 > 하루하루 그냥.

☏ 함일송 > 욕심도 없어졌고 꿈도 없어졌고 아무 계획도 없고 하루 일어나면 일 가고 일 끝나면 집에 오고 아무 생각도 없고 그냥 살아 가고 것 같아요. 그래서 와이프한테 미안해요. 정신도 없어서.

☏ 진행자 > 근데 동생분이 결혼하셔가지고 남편과 아이도 있었다면서요.

☏ 함일송 > 예, 있어요. 아이 9살짜리 지금 아들 한 명 있거든요.

☏ 진행자 > 아이고. 아이가 엄마 많이 찾겠네요.

☏ 함일송 > 가끔씩 많이 찾기도 하고 너무 참담하고 불쌍하고 그냥 많이 미안하고 조카한테, 여동생이 있을 때는 어디 놀러 가든 물병 같은 걸 깨끗한 물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학교에서 슬픈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잠깐만요. 집에 오면 엄마한테 말도 꺼내고 그리고 엄마한테 많이 위로를 받고 그리고 엄마 있을 때는 언제나 깨끗하게 밥도 잘 먹고 옷도 챙겨 입히고 했었는데 참사 이후에는 머리도 가시시하고 샤워도 며칠에 한 번씩 하고

☏ 진행자 > 조카가.

☏ 함일송 > 네, 엄마 있을 때는 활발하고 그리고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애교 부릴 때는 애교 부리고 참사 이후에는 우는 거 자체도 옆에 있는 사람들 아빠랑 그 옆에 친척 분들 눈치 보고 있거든요. 우는 것도 눈치 보며 우는 거 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요.

☏ 진행자 > 동생분이 한국에 오시고 나서 처음으로 축제에 놀러 간 게 바로 그 이태원 핼러윈 축제였다면서요.

☏ 함일송 > 예, 저희 동생이 1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이태원이라는 곳 잘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간 적 없어요. 그날 처음 핼러윈데이 친구랑 자기 인생도 즐겁게 여유롭게 지내보자 해서 처음으로 놀러갔어요. 그리고 참사 당한 거죠.

☏ 진행자 > 그러게요. 집 마련하기 위해서 대출받았던 것도 지난해에 다 갚았다면서요.

☏ 함일송 > 예, 22년도인가 다 갚았어요.

☏ 진행자 > 이제 허리 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 함일송 > 예, 그리고 빚도 없고, 은행 빚도 없고 새 차 산 것도 빚도 없고 회사에서 너무 열심히 해가지고 회사에서 인정해 줘가지고 부장급까지 올라갔거든요. 동대문에서 중국하고 대만 쪽으로 물류를 보내는 회사였는데 부장급까지 올라가서 자기 인생을 많이 즐겁게 살자. 여유롭게 살자. 그렇게 22년도에 1년 동안 너무나 멋있게 아들이랑 가족이랑 같이 인생을 여유롭게 즐기고 해왔어요.

☏ 진행자 > 다른 유가족 분들하고는 교류를 좀 하세요?

☏ 함일송 > 초창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우리 지안이 아빠랑 우리 유가족협의회 기자회견 성립하고 할 때부터 같이 해왔거든요. 저는 그냥 옆에서 아무 역할도 안 하고 같이 따라다니고 간담회 있으면 참석하고 그때 초창기부터 일단 유가협 그쪽으로 많이 같이 해왔어요.

☏ 진행자 > 함께하셔야죠. 위로가 되죠. 그래도 선생님.

☏ 함일송 > 처음에는 저희들도 특별한 별가족 새로 생겼다 했었는데 처음에는 서먹서먹해가지고 말도 걸지도 못했고 시간 좀 지나서 서로 인사하게도 되고 서로 만나서 손도 잡아주고 서로 아들 딸 그 다음에 형제들 이야기도 나누면서 서로 위로하게 돼서 많이 마음이 많이 따뜻하게 됐어요.

☏ 진행자 > 이것 여쭤볼게요. 최근에 용산구의회에서 이 참사 희생자 추모하고 안전문화 구축하는 내용의 조례안 발의를 했는데 국민의힘 구의원들이 심사를 보류해서 통과되지 못했다고 하고요. 그리고 한 구의원은 추모공간을 혐오시설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면서 이런 걸 하면 장사가 되겠냐,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데 소식 들으셨죠? 선생님. 어떤 생각 드셨어요?

☏ 함일송 > 봤어요. 저희 유가족은 심정들은 다 똑같아요. 참담하고 열통이 벌어지고요. 국가 정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인도적으로 국민 외국인 포함해서 159명이나 희생 죽음을 당했는데 저희들의 추모공간을 어떻게 혐오시설이라고 막말, 무책임한 말할 수 있는가 너무 이해도 안 되고요. 그리고 윤석열이 참사골목에 함부로, 골목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망자가 나타났냐. 아마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죽었겠지 하는 대통령부터 2차 가해시다. 선동해왔고요. 한덕수, 치료받겠다는 생각 더 강했으면 3차 가해까지 받았고요. 이상민도 경찰과 소방 미리 배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니라고 4차 가해까지 하고 너무 쉽게 나오거든요. 이런 3차 4차 5차.

☏ 진행자 > 그래도 너무 상처받지 마시고요. 꿋꿋하게 버티셔야 됩니다. 선생님.

☏ 함일송 > 너무나 이해가 안 가요.

☏ 진행자 >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들어야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 함일송 > 알겠습니다.

☏ 진행자 > 지금까지 희생자 함영매 씨의 오빠 함일송 씨와 함께했습니다.

[내용 인용 시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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