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 불발, 韓 소속 국가그룹 없는 한계 확인… 다자외교 지평 넓혀야[Deep Read]

2023. 12. 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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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준의 Deep Read - 엑스포 유치 실패의 교훈
한국, 국제무대에 소속된 그룹 없어 고립… ‘엑스포 유치’ 같은 큰 경쟁에선 치명적
경제력은 강국 반열이나 외교력은 취약… 정체성 공유하는 집단 국제 원군의 확보 절실

지난달 29일 새벽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의 2030년 엑스포 개최지 선정 1차 투표 결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는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음으로써 29표의 부산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돌이켜보면 패배라기보다는 불가항력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만큼 유치 추진 초기 단계부터 회의론이 많았던 도전이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소속 ‘국가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다. 경제력에서는 강국 반열에 올랐지만, 외교력에서의 국제 위상은 여전히 취약하다. 엑스포 유치전 같은 큰 경쟁 무대에서는 집단적 국제 원군의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불가항력 경쟁

교섭보다 어려운 건 교섭 결과의 분석이다. 그 같은 분석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외교무대에서는 아무도 부정적 응답을 하지 않으며 경쟁국 쌍방에 모두 지지를 약속하는 나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외교부 유엔 담당 부서에는 그런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유엔과 각종 국제기구의 사무총장 선거, 이사국 선거, 결의안 표결 등을 둘러싼 외교전쟁을 매년 몇 차례씩 치르면서 교섭 대상국들의 ‘외교적 수사’ 속에 숨겨진 진실성에 다가가는 기술과 지혜를 배운다. 외교 교섭에서 지지 요청을 받은 나라들이 보이는 반응은 일반사회의 언어와 많이 다르다. ‘적절히 검토하겠다’는 건 다분히 부정적 반응이고, ‘호의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건 중립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반응이다.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나라만이 확실한 지지국이다.

지지를 약속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변심하지 못하도록 이를 문서로 통보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웬만하면 그 정도로 그치지만, 문서로도 믿을 수 없는 경우엔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는 극단적 방식을 쓰기도 한다. 그런 요청을 받은 나라는 다른 경쟁국과의 관계 손상을 감안해 여간해서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유치국 선정 표결을 앞두고 사우디는 무려 122개 회원국으로부터 공개 지지성명을 받아냈고, 그중 119개국이 실제로 사우디에 투표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교섭을 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고립적 외교 입지

한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교섭전쟁에서 치명적이고 태생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디에도 ‘소속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라는 점이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의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아프리카·중동그룹 70여 개국의 집단적 지지를 받는다. 유럽국은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의 지원을, 중남미 국가는 중남미그룹 35개국의 지원을 받는다. 심지어 구소련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CIS)과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지원을 받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는 10개 회원국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다. 그 밖에도 이슬람 국가는 이슬람회의기구(OIC) 57개 회원국으로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52개 영연방 회원국으로부터 집단적 지지를 받는다.

한국은 그 어느 그룹에도 소속되지 않은 외로운 나라다. 과거엔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 그룹의 동정표라도 받았으나 개도국을 졸업했으니 이젠 그것도 안 된다. 이 때문에 한국은 국제사회의 표 대결에서 경쟁 상대국들이 기본자산으로 등에 업고 시작하는 수십 개의 지지표는 꿈도 꿀 수 없고, 맨바닥에서 시작해 한 표 한 표 힘겹게 얻어 와야 한다.

혹시라도 이번 사우디와의 경쟁처럼 대규모 그룹의 지지를 받는 나라가 경쟁 상대가 되면 힘겨운 싸움을 하다 패하거나 아예 경쟁을 포기해야 한다. 이웃 일본도 유사한 상황이나, 그래도 일본은 주요7개국(G7) 회원국이자 쿼드(QUAD) 회원국이니 우리보다는 사정이 조금 낫다.

◇과거 성공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988 올림픽, 2002 월드컵, 2018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그때는 성공했고 2010 여수 엑스포 와 2030 부산엑스포 유치에는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 성공했던 유치 경쟁은 이번 사우디와의 무제한 대결과는 성격이 다른 ‘약자들 사이의 제한적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1988 서울올림픽의 경우, 대륙별 순환 개념에 따라 아시아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데 대한 국제적 컨센서스가 있었기에 서울과 나고야(名古屋) 두 도시의 경쟁으로 좁혀졌고, 따라서 더 강력한 상대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경제력이 막강했으나 외교력 면에서는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고, 개도국의 일원이던 한국은 ‘올림픽이 선진국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로 개도국 그룹의 집단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2002 월드컵의 경우도 약체 일본과의 대결이었다. 일본은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 출사표를 내고 2002년 ‘월드컵 유치는 아시아의 몫’이라는 양해를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일본의 단독 유치 신청이 예상되던 상황에서 일본보다 5년 늦은 1994년 출사표를 냈다. 예측 불허의 첨예한 대결이 되자 패배 시의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한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 개최안에 동의함으로써 합의가 이뤄졌다.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없는 가운데 3수 도전에 나선 평창이 동정표까지 끌어모아 압승한 결과였다.

◇실패로부터 배울 것

한국이 유치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는 2010·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 2010·2030년 엑스포 유치 실패 등 4건이다. 이들 실패 사례의 공통점은 1988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과는 달리 아시아에 국한된 제한 경쟁이 아니었고, 한국보다 외교력이 강한 상대국이 총력을 기울여 유치에 노력했다는 점이다. 또한 경쟁 상대가 밴쿠버(캐나다), 소치(러시아), 상하이(上海·중국), 리야드(사우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반면 한국이 내세운 개최지는 평창, 여수 등 국제적으로는 생소했다.

실패 사례 중 가장 아쉬운 것은 2010년 엑스포 유치를 둘러싸고 2002년 여수와 중국 상하이 사이에 벌어진 경쟁이었다. 그때 88개 회원국이 참가해 4차 투표까지 간 끝에 여수가 20표 차이로 패했다. 당시 한국은 단지 국내 정치적 고려에서 개최지를 여수로 선정했었는데, 여수는 국제적 지명도도 없었고 준비 상태도 엉망이었다. 만일 그때 유치 도시로 서울이나 인천을 내세웠다면 상하이를 누르고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향후 엑스포 유치를 위한 세 번째 도전을 하게 될 경우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실패의 교훈이다.

세종연구소 이사장, 전 외교부 북핵 대사

■ 용어 설명

‘엑스포’는 국제박람회기구에서 주관하는 세계 최대의 공공 박람회로, ‘등록박람회’와 특정 주제에 의한 소규모 ‘인정박람회’가 있음. 한국은 대전(1993)과 여수(2012) 등 인정박람회 개최.

‘외교적 수사’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제무대에서 말로 인한 예절 문제가 실용적인 논의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전한 어법. 외교가에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금기시됨.

■ 세줄 요약

불가항력 경쟁 : 사우디는 2030 엑스포 유치전에서 회원국 182개국 중 122개국의 공개 지지성명을 얻고 이 중 119개국의 찬성표를 이끌어 냄. 이번 유치전 결과는 한국의 패배를 넘어 불가항력이었던 상황이었음.

고립적인 외교 입지 :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소속 ‘국가 그룹’이 없는 고립된 존재. 이는 교섭전쟁에서 치명적이고 태생적인 결함으로 작용. 경제력에서는 강국 반열에 올랐지만 외교력에서의 국제 위상은 여전히 취약.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다 : 한국의 국제행사 유치전 성공 사례들은 과거 ‘약자들 사이의 제한적 경쟁’에서 틈새를 찾은 결과. 향후 다자외교의 지평을 넓혀 세계적 경쟁 무대에서 집단적 국제 원군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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