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오리고 읽는 퍼포먼스는 50년 넘게 현재진행형
전위작가 성능경의 문제작 신문읽기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이 하늘을 찌르던 1974년 10월24일은 한국 민주언론사에서 큰 분수령을 이룬 날이다. 당시 국내 최고 권위지였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외부 간섭과 기관원 출입을 거부한다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다. 밥 먹듯이 자행되던 정권의 검열과 기자 연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어난 항거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박정희 정권은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한다. 동아일보사는 해약된 광고면을 그대로 백지로 제작해 발행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열한 언론탄압의 사례로 널리 회자되는 백지광고탄압사태였다.
흥미롭게도 1974년 12월 광고탄압사태가 나기 넉달 전인 8월 서울 덕수궁 국립미술관 지하전시실에서는 이를 예언하는 듯한 미술인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동아일보의 지면을 읽은 뒤 샅샅이 오려내어 빈 껍데기로 만드는 기발한 행위예술로 누구도 감히 예견은커녕 드러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언론 탄압과 압박의 실상을 예언자처럼 보여준 작품이 나온 것이다.
청년 전위작가들의 모임 에스티(시간과 공간)그룹의 정기 전시에 참여한 작가 성능경이 동아일보 신문지면을 가위로 오려 기사를 잘라내어 통속에 던지고 껍질만 남은 신문지면을 벽면에 붙였다가 떼어서 역시 통속에 집어넣는 행위예술을 일주일 이상 진행한 것이다. 홍대 서양화과를 나와 1973년 초 군대를 제대한 이 청년 작가는 이른바 입체예술과 노자 장자를 읽어야 그릴 수 있다는 단색조 추상회화가 유행했던 유신시대 초반의 미술판이 마뜩잖았다. 누구나 읽는 정보의 집적체였고, 당시 답답한 시대상이 녹아있는 신문을 갖고 탈물질적 행위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껴 저지르듯 시작한 퍼포먼스였는데 이 작품이 50년이 지난 지금 한국 현대미술사 희대의 문제작으로 등극한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작가는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막 제대하고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은 일자무식 작가에 가까웠어요. 제대 직후 에스티 그룹 전시를 1973년에 했는데 저도 입체미술이라고 불리는 입체적인 조형 작품을 냈다가 조롱에 가까운 반응을 받고 충격을 받았죠. 다른 동료들은 전부 입체미술을 하는데 뒤늦게 제대하고 제가 그들의 작업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입체적 작품이 아니라 탈물질적인 작품을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거의 유일한 소통의 매체였던 신문에 눈길이 갔어요. 당시는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야만 하는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신문 자체가 제대로 된 정보나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빤히 보이는 거죠. 일방적인 소통이 강요된다는 답답함이 있었고 다른 방향의 소통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부친이 구독하면서 오랫동안 봤던 ‘동아일보’를 점찍었지요.”
그는 처음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부터 기관원에게 걸리지 않을까 싶어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 먹은 뒤 가판대에서 동아일보 두부를 사서 부리나케 수십여분 만에 기사를 잘라 버리고 신문지 붙이고 도망치듯 전시장을 빠져나오길 거듭했다. 전시실에 기사가 오려진 채 걸린 신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경향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이 노출되면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할 것이 두려워 단칼에 거절했다는 기억도 털어놓았다.
애초 읽지는 않고 오리기만 했던 작업은 1975년 일본에서 앞서가던 전위미술 양상을 보고 귀국한 선배 작가 김구림을 찾아가 더욱 구체적인 자양분을 얻게 된다. 무의식적인 해프닝 대신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위예술인 이벤트가 새로운 흐름이란 정보를 얻은 그는 전해 자신이 했던 오리기에서 더 나아가 신문기사를 큰 소리로 읽고 오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1976년 이건용 김용민과의 이벤트 3인전 전시를 통해 그의 퍼포먼스는 더욱 구체적인 꼴을 갖추어나간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화단 동료들한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이른바 체제 저항적인 시국 작품 성격이 농후한데다 입체작품 평면의 반복되는 붓질, 연필 자국 등의 단색조 추상회화 등 물질성에 치중한 당대 미술경향에 저항했던 성격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1976년 이래 이 작품은 이른바 물밑에서 새로운 변주를 준비하는 과정에 접어든다. 작가는 절망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따금씩 진행되는 동료 행위예술인들의 무대에서 작품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 탈물질성과 시대상황을 결합한 퍼포먼스의 고전을 탄생시켰는데도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는데는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20여년간 주위의 무관심 속에 가끔씩 홀로 퍼포먼스로만 실행되던 신문읽기는 2019년 경기도 미술관이 행위 자체의 매뉴얼을 구입해야할 소장품으로 인정하는 파격적 조치로 명실상부한 한국미술사의 명작으로 공인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올해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의 주요 출품작으로 신문 오리고 읽기를 선택하고 현지 퍼포먼스 계획을 확정한 뒤 더욱 주목받는 작품이 됐다. 지난 5월 서울 자하미술관 전시장에서 30여명의 참석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펼쳐진 성능경의 신문 읽고 오리기 퍼포먼스가 진행됐고 지난 9월엔 고덕동 라이트룸에서 갤러리 현대의 후원으로 100명 넘는 내외국인이 작가와 함께 신문을 읽는 장관을 펼쳤다.
11월 뉴욕 퍼포먼스는 원래 원형대로 단독 무대로 진행됐지만 현지 관객의 환호성 속에 큰 호평을 받았다. 유신시대의 폭압 속에서 사그라질 것 같았던 이 신문읽고 오리기 퍼포먼스는 종이신문이 빈사의 위기를 맞은 지금 신문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다중이 읽는, 생명력을 가진 현재진행형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계속 존속하고 변주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작가 개인이 아닌 다중 참여자가 웅성거리며 읽고 신문을 자르는 모습은 에스엔에스(SNS)의 양상과 유사하다. 앞으로 디지털 상황에서도 더 많은 다중을 상대로 이 퍼포먼스가 진행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성능경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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