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길 만드는 EBS의 위대한 여정, 계속될 수 있을까

김영화 기자 2023. 12. 1.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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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의 강연을 무료로 제공하는 EBS 〈위대한 수업〉은 ‘수신료 70원의 기적’이라 불린다. 하지만 다음 시즌을 제작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EBS 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이주희 PD(왼쪽)와 허성호 PD. ⓒ시사IN 신선영

경기 고양시 EBS 본사 로비에 들어서자 기둥마다 자리를 꿰찬 〈위대한 수업〉 시즌 3 홍보물이 눈에 띄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시린 에바디, 폴 로머 등 노벨상 수상자들의 얼굴 옆으로 ‘세계 최고의 지성을 만나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포스터를 다 붙였는데 갑자기 촬영을 못하겠다 하는 분이 나타난 거예요.” 〈위대한 수업〉을 시즌 1부터 맡아온 허성호 PD에겐 아찔한 순간 중 하나다. 포스터를 떼야 하나 수습하던 와중에 “태어나서 쓴 가장 비굴한 영어 편지” 석 장을 보내고서야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수명이 계속 단축되는 느낌”이라며 허 PD가 웃었다. ‘한국 방송 역사상 최고의 라인업’이라 불리는 프로그램에 서려 있는 제작진의 애환이었다.

EBS 〈위대한 수업〉은 공영방송 위기 시대에 ‘수신료 70원의 기적’이라는 드문 수식어를 얻은 프로그램이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총, 균, 쇠〉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뿐만 아니라 폴 크루그먼, 주디스 버틀러, 제인 구달, 록산 게이 등 저명한 인사들이 한국 교육방송의 강연자로 나서 화제를 모았다. 제임스 캐머런이 말하는 ‘스트리밍 시대의 영화’란 무엇인지, 또 위화 작가가 생각하는 ‘중국인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 국내 어디서나 무료로 들을 수 있다. 2021년 8월 방영을 시작해 지금까지 전 세계 전문가 90여 명이 20분짜리 강의 950여 개를 녹화했다.

시즌 3에 접어들면서 프로그램의 인기를 실감할 때가 있다. “요즘에는 출연하고 싶다고 손 들고 찾아오는 분들도 있어요. 저희가 종종 돌려보내기도 하고요.” 지난주 막 미국 출장을 다녀온 허성호 PD의 말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탄다는 후기도 전해 들었다. K콘텐츠의 인기에 힘입은 효과인 것 같다고 겸손한 답변을 내놓았지만, 한 달의 절반을 해외에 머물다시피 하는 제작진의 분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200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프랭크 윌첵도 <위대한 수업> 시즌 3에 출연했다. ⓒEBS

‘위대한 섭외력’으로 더 유명한 〈위대한 수업〉은 코로나19 팬데믹 한복판에서 기획되었다. 계층 간 지식 격차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던 시기다. 처음엔 현존하는 최고의 지식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문턱을 낮추자는 아이디어 차원이었다. EBS가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운영 사업을 받아와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이미 해외에는 테드(TED) 같은 강연 콘텐츠가 있지만 국내에선 첫 시도였다.

난관이 있다면 코로나19였다. 시즌 1을 만들 땐 PD 여섯 명이 “목숨 걸고” 출국길에 올랐다. 올해로 13년 차 허성호 PD는 6개월 동안 미국 동서부를 정처없이 떠돈 적도 있다. 촬영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극적으로 연결된 유발 하라리를 만나러 이스라엘을 들렀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를 인터뷰할 땐 그의 자택에서 제작진 모두 3시간 동안 방호복을 입고 진행했던 일화도 인상적이다.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은 원서를 구해 읽는 것은 기본이고,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연구소 앞에서 무작정 ‘뻗치기’를 하기도 한다.

생면부지의 석학들에게 메일을 수백 통 보내면서 깨달은 사실은 ‘레터의 최종 전달자가 누구냐’에 따라 섭외가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시즌 1에 출연한 비노드 아가왈 UC 버클리 정치학 교수가 그 물꼬를 터주었다. 15년 전 허 PD가 대학생이던 시절, 은사인 구민교 당시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가 한국을 방문한 아가왈 교수의 한국 안내를 부탁한 게 첫 인연이 되었다. 아가왈 교수와 배드민턴을 치고 한국 과자를 구해다 줄 때만 해도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대학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흔쾌히 섭외를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학계 인사들에게 ‘내 한국인 제자가 이런 방송을 만드는데 한번 도와달라’며 직접 연락을 취해주었기 때문이다. 아가왈 교수가 첨삭해준 섭외 메일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원본을 완전히 갈아엎고 수정해주셨어요. 메일 상단에 출연료를 딱 명시하고 회사 소개는 매우 간단하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요. 하루에도 메일을 수백 통 받을 텐데 저희가 너무 동양적으로 겸손하게 썼던 거죠.” 아가왈 교수는 시즌 3에도 재출연 의사를 밝혀 ‘자유무역의 역사’를 주제로 15강짜리 장편 강의에 도전했다.

다중지능이론 창시자이자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 하버드 대학 교육학 교수가 <위대한 수업> 촬영에 임하고 있다. ⓒEBS

EBS라서 가장 잘할 수 있었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지난 3년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출연자다. 법과 정치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설득해온 세계적 정치철학자인 만큼 처음부터 섭외 리스트에 올랐으나, 제작진이 보낸 섭외 메일들은 묻혔다. 그때 도움을 준 건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허 PD의 누나다. “학자 대 학자로” 메일을 보내니 10분 만에 바로 하겠다고 답이 왔다. ‘공부할 때부터 교수님의 연구를 굉장히 존경했고 저희 어머니와 동갑이셔서 더욱 반갑다’며 정성을 들인 메시지가 통했다. 시즌 1에 섭외되었는데 누스바움 교수 사정으로 촬영이 미뤄졌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3년 연속 홍보 포스터에 이름이 실린 사연이다. 누스바움 교수와 주고받은 메일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다.

〈위대한 수업〉 제작진이라면 기본적으로 석학을 섭외할 정도의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야 하는 거냐고 묻자, 두 PD가 웃었다. 섭외하는 데 개인의 역량은 10%일 뿐, 90%는 조직이 가진 힘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28년째 시사교양을 담당해온 이주희 PD는 “국내에서 누군가 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면 EBS가 가장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큐프라임〉을 수십 년간 제작해오면서 형성된 전문가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기획 의도를 봤을 때 이 PD가 그리 허황된 기획이라고 여기진 않았던 이유다.

누구를 출연시킬지부터 관건이다. 때론 명성과 연구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다. 특히 국내에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 대거 나온 시즌 1이 끝난 뒤 고민이 깊어졌다. 화제성은 높았지만 백인 남성 위주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부터 국내 전문가 13인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1년에 두세 번 정기회의를 통해 강의력과 연구 실적 등을 검증한다. 시즌 2부터는 젠더와 인종이 다양한 연사를 구성하려 노력했고 시즌 3엔 역대 최다 노벨상 수상자 출연으로 주목받았다. 섭외부터 방영까지 대략 6개월 정도, PD 여섯 명을 포함해 30명 남짓한 국내 제작진이 만들어낸 성과다.

이주희 PD(왼쪽)는 다양성과 다원성이 공영방송이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 가치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섭외의 비법을 묻는 질문에 허 PD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은 돈을 주고 섭외한 거예요. 진짜 어려운 섭외는 미디어에 잘 등장하지 않지만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내놓고 있는 사람을 굉장히 저렴한 비용에 섭외하는 것입니다.” 3년째 방송을 총괄하면서 ‘좋은 섭외’가 무엇인지 궁리하게 된다. 프로그램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상업방송사가 맡는 순간 굉장히 고비용 프로그램이 될 겁니다. 상업방송이 이미 뜬 연사를 비싼 값에 섭외한다면, 우리는 ‘저평가 우량주’를 발굴하는 거죠. 이제까진 노벨상 수상자를 섭외했다면 앞으로는 〈위대한 수업〉에 나왔던 사람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화제성만으론 프로그램을 지속하기 어렵겠다는 그의 결론은, 공영방송의 제작비 문제와 맞물린다. 다음 시즌을 제작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라서다. EBS 〈위대한 수업〉팀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3년간 매년 49억원을 지원받았다. 여기에 인건비와 간접 제작비 등 EBS 자체 예산을 투입한다. 문제는 제작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비 지원이 매번 입찰 형태로 진행되다 보니, 안정적인 편성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부 사업은 3개년이 기본인데 저희가 내년에도 사업자로 선정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정부 지원 없이도 계속 만들려고 노력하겠지만 굉장히 어려움이 커질 거예요.” 이주희 PD의 말이다.

“한국의 납세자들이 존경스럽다”

거기에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 시행으로 인해 내년부터는 수신료 재원도 더 줄어들 전망이다. 허성호 PD는 공영성을 지키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는 KBS에서 공영성이 제일 높은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국악 한마당〉이라고 생각해요. 시청률은 높지 않은데 그 프로그램이 없으면 국악이라는 문화적 자산을 전승할 수가 없어요. 〈위대한 수업〉도 원리가 비슷합니다. 너희가 벌어서 먹고살라고 하는 순간, 굉장히 선정적인 아이템과 인물을 잡아서 논란을 만들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당장 저희 자문위원회를 통과할 수 없을 거예요.”

알렉스 캘리니코스 런던 대학 킹스칼리지 ​​​​​​정치학 교수의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EBS

시사교양 콘텐츠의 축소는 제작비 삭감과 구조조정 등으로 나타나는 공영방송 위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양태다. 최근 몇 년간 방송사 대형 다큐멘터리, 교양 콘텐츠 할 것 없이 수가 급격히 줄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EBS 〈다큐프라임〉을 만들어온 이주희 PD는 ‘EBS적인 다큐멘터리’가 무엇인가 고민한다. 보통 10부작으로 방영되는 〈다큐프라임〉의 제작 기간은 1년이다. “어느 언론학자가 EBS에 대해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EBS라는 회사가 하나의 장르라는 거예요. 그냥 방송이 아니라 교육방송이기 때문에 DNA부터 공영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요. 이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EBS가 하니까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 거죠.“

‘이런 모습’이란 건 결국 다양성이다. 2021년 9월 ‘퀴어 이론’의 대가 주디스 버틀러 방영을 앞두고 커진 논란에 대응하는 자세도 그랬다. 보수 단체가 그의 이론이 위험하다며 방송 중단을 요구하고 피켓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제작진은 국내 주디스 버틀러 이론 전공자 다섯 명에게 강연 영상과 단체들 주장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했고, 결과적으로 버틀러와 관련해 객관적 사실이 아닌 내용에 대해선 정정보도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논란이 잦아들고 예정대로 방송을 내보낼 수 있었다. 허성호 PD는 “이론의 지지 여부를 떠나서 다양한 의견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막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간 국제 학계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한국에서 EBS 〈위대한 수업〉이 심어놓은 씨앗은 이제 막 싹을 튀우기 시작했다. 시즌 3 출연자인 하워드 가드너 하버드 대학 교수는 “한국이 지식 콘텐츠 사업의 선두에 있다”라고 평가했고, 지난 시즌에 나온 ‘민주주의 연구의 거장’ 애덤 셰보르스키 뉴욕 대학 교수는 “한국의 납세자들이 존경스럽다”라고 말했다. 석학들과 소통해온 허성호 PD는 〈위대한 수업〉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한다. “지식에 대한 예민도가 떨어지면 그 사회는 동력을 잃어버린다고 봐요. 특히 한국처럼 인적 자원이 전부인 나라에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시대의 가장 각광받는 지식을, 백령도부터 울릉도, 마라도 끝단까지 방송할 수 있다는 것이 존재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미래엔 한국 국적의 연사가 그의 카메라에 담기길 고대한다. 없던 길을 열어가는 공영방송의 위대한 여정은 계속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만난 수백 명 연사 중 가장 위대한 수업을 뽑아달라는 제안에 한참을 생각하던 두 PD는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리는 테런스 타오 UCLA 교수 강의(이주희 PD)와 리더십의 기술을 주제로 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 케네디스쿨 석좌교수 강의(허성호 PD)를 꼽았다. “수학이 의대를 가기 위한 수단이 된 사회에서 수학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강의이고, “정치학과 역사학을 잘 결합시켜 학술적인 접근이 부담스러운 분들도 누구나 볼 수 있는” 강의라고 했다. 허성호 PD는 이렇게 부연했다. “짧게 요약한 영상만 보아도 사회의 진보에 교육방송이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현존하는 최고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테런스 타오 UCLA 교수와 허성호 PD. ⓒEBS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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