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핫플] 낡은 세월의 흔적, ‘힙한’ 온기로 채워지다

지유리 기자 2023. 12. 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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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핫플] (26) 충남 부여 자온길
과거 꽤 잘나가던 규암마을
백제대교 개통후 쇠락의 길
5년전 ‘책방 세간’ 들어선후
염색공방·전시관 등 줄줄이
과거와 현재 공존하는 거리
옛 세대에게 추억 선사하고
젊은이에겐 신선한 볼거리
해가 갈수록 방문객 ‘급증’
부여서 유일하게 인구 늘어

왕년에 충남 부여의 규암마을은 꽤 잘나가는 곳이었다. 나루터가 있어 무역이 성했고 오일장이 설 때면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동네 선술집만 60여개에 달했다고 하니 그 세를 알 만하다. 1960년대 금강을 가로질러 규암마을과 부여읍내를 잇는 백제대교가 개통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사람들이 강 건너로 이주하면서 마을은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5년 전 ‘책방 세간’이 들어섰다. 그 옆에 염색공방이, 뒤편에 전시관이 생겼다. 오래 방치된 빈집에 ‘힙한’ 가게가 들어섰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대에 ‘자온길’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었다. 이내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라면 한번쯤 다녀간다는 레트로(Retro·복고) 여행지이자 촌캉스 명소로 자리 잡았다.

충남 부여 규암마을 자온길의 시작이 된 ‘책방 세간’.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도시에서 온 관광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즐겨 찾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다

1970∼1980년대 풍광을 간직한 자온길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책방 세간 앞에 서면 1970년대로 날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본래 담배가게였던 건물은 한눈에 봐도 긴 세월을 알아챌 만큼 낡고 허름하다. 때 빼고 광을 내 고쳤을 테지만 시간의 더께가 쉬이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이다. 미닫이문은 삐걱대고 기둥은 여기저기 흠집 나고 까졌다. 고색창연한 풍취에 감탄하며 안쪽으로 들어서는 찰나, 눈앞은 금세 2023년으로 점프한다. 미러볼이 돌아가는 듯 번쩍거리는 벽면에 추상화 같은 책 표지가 그림인 양 전시돼 있다. 그사이 다시 소반과 자개반닫이가 복고풍을 잊지 말라는 듯 존재감을 뽐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생경한 모습이 신기해 연신 눈동자를 굴리게 된다.

서까래를 드러내고 옛 물건으로 채운 책방 세간 내부. 안으로 들어서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책방 세간은 자온길을 기획하고 조성한 세간의 박경아 대표가 서울에서 부여로 내려와 처음 문을 연 곳이다. 박 대표는 규암마을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재학 시절 이곳을 알게 됐고 독특한 정취에 매료됐다. 졸업 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공방을 할 때도 부여를 잊지 못하다가 결국 돌아왔고 헌 집을 구해 서점을 차렸다.

“어릴 때부터 옛것에 관심이 갔어요. 오래되고 평범한 것도 잘 쓸고 닦으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부여에 온 박 대표는 담배가게나 국밥집처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물만 골라 되살렸다. 책방 세간도 그런 곳이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빈집을 본모습 그대로 고쳐 책방으로 꾸몄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됐다.

큰길가에 있는 카페 ‘수월옥’의 정체는 과거 규암마을에 차고 넘치던 선술집 가운데 하나다. 문자 그대로 쓰러져가던 것을 고쳤다. 한옥과 양옥이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특이한 구조였는데, 과거와 현재가 오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수월옥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건 내부를 채운 기물이다. 테이블 대신 소반이, 커피잔 대신 전통 찻잔이 쓰인다. 손님은 오래된 방석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곳곳을 채운 물건은 대부분 골동품이다. 앳된 얼굴의 소년·소녀가 50년 넘은 건물에 앉아 우리네 옛 물건을 자연스레 사용한다. 박 대표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전통 공예품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밖에 양조장을 고친 레스토랑 ‘자온양조장’, 철마다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이뤄지는 100년 한옥 ‘이안당’, 게스트하우스 ‘작은한옥’ 등은 하나같이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나 젊은이들에겐 신선한 볼거리를, 옛 세대에겐 추억을 선사한다.

시간이 날 때면 자온길을 찾는다는 현경숙씨(54·부여읍)는 “가끔 생각나는 동네”라며 “고향 같은 푸근한 맛이 있어 언제 와도 편안한 곳”이라고 귀띔했다.

스스로 따뜻해지는 길

자온길을 걷다보면 허름한 건물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가게들을 만날 수 있다.

규암마을에는 자온대라는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시대 왕이 바위에서 놀면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박 대표는 이 전설에서 ‘자온(自溫)길’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문화가 자리 잡으면 사람이 모이고 그러면 마을이 자연스레 따뜻해지리라는 희망을 담았다.

다행히 그의 바람이 착실히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처음부터 수월치는 않았다. 외지인이 빈집을 사서 가게를 내는 것을 보고 ‘땅값을 올린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돈 벌어 서울로 돌아갈 사람이라며 곁을 내주지 않은 적도 많았다.

숱한 오해에도 박 대표가 지금까지 버티는 건 “전통 공예로 마을을 되살리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크고 멋진 건물을 짓는다고 사람이 오지 않아요.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겐 문화 공간이 필수 시설입니다. 일상에서 쉽게 음악공연을 즐기고 북토크나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런 곳이라면 어디든 청년들이 가고 싶어 하고 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들의 온기가 마을 곳곳에 스며 마을을 바꿀 겁니다.”

50년 넘은 양옥과 한옥이 나란히 선 수월옥. 허름한 외관을 고치기보단 그대로 살려, 세월을 느끼도록 했다. 부여=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기웃거리며 자온길을 걷는다. 자온길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청년들의 사랑방이 된 책방 세간 옆에 오랫동안 마을을 지킨 다방·미용실·세탁소가 있다. 조금 더 가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근처에 빈 건물도 꽤 많다. ‘더이상 볼 것이 없다’ 싶을 때쯤 세련된 외관의 전시관이 나오고 카페와 레스토랑이 나온다. 과거와 현재, 관광 명소와 원주민의 삶의 터가 교차하는 것이 자온길의 매력이다.

더디지만 자온길은 부여를 바꾸고 있다. 수월옥이 문을 연 첫해 3만명이 방문했다. 부여 인구가 6만1000여명인 것을 떠올리면 적지 않은 숫자다. 해가 갈수록 방문객이 배로 뛴다고 한다. 올가을 이안당에서 열린 콘서트는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매진됐다. 자온길이 조성된 후로 청년 예술인이 들어오면서 공예마을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부여군은 전체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데 규암면만 유일하게 인구가 늘었다. 자온길의 온기가 부여를 뜨겁게 데울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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