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67.늦가을에 읽는 김유정의 ‘만무방’

이광택 2023. 12. 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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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 빈 지게에 내려앉은 능선의 잔주름
대지가 메마를 무렵 읽어야 할 소설
일제강점기 농촌 실상 고스란히 담겨
농민 꼭두새벽부터 일해도 남는 건 땀
‘농군의 살림이란 제 목매기’로 표현
가족이 살기 위해 야반도주하던 날
속 시린 달빛·고샅길 창호지처럼 창백
▲ 이광택 작, ‘유랑하는 농민’

어린아이 얼굴 크기만 한 목련의 버쩍 마른 잎사귀들이 솨스르으 솨스르으 바람에 스산하게 쓸리고, 먹장삼 빛깔로 깊고 어두운 밤, 오늘처럼 늦가을 비라도 노인네 지절거리듯 창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나는 김유정의 소설, 그중 특히 가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무릇 김유정 하면 소설 ‘동백꽃’, ‘봄·봄’이 가리키듯 봄이 떠오른다. 정말이지 가슴 아롱아롱한 사춘기 소녀들의 얼굴을 아슴한 보랏빛 생기로 물결치게 하는 그 노오란 동백꽃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감빨리듯 달뜨게 만들던가! 그럼에도 요즘처럼 붉던 가을 산이 또 한 번 색채를 갈면서 더욱 칙칙하게 메말라갈 때면 이때 읽어야 할 소설들이 있다. 바로 ‘가을’, ‘노다지’, ‘산골 나그네’…… 그중 압권은 역시 ‘만무방’이다.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빽빽이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만무방’이라는 우리말의 뜻이 소설의 얼개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예의와 염치가 도무지 없는 사람’, ‘막되어 먹은 사람’이다.

주인공 응칠은 그야말로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 없고 뒤에서 밀어주는 누구 하나 없는 뜨내기 신세이다. 그렇지만 말이나 몸가짐이 방정맞고 신실하지 못한 경박자(輕薄子)는 절대 아니다. 기걸스러운 체구에, 특히 광채 나는 눈빛과 마주하면 어지간한 사내도 ‘대번에 구부러지며’ 술을 내고 담배를 사주는, 꺽진 인간의 전형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일제강점기 식민지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드러난 한국 농촌의 실상이 볼록거울을 통해 사물을 보듯 선명하게 나타난다. 동생 응오에게 “농군의 살림이란 제 목매기”라고 하는 응칠의 말 한마디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농민들의 생활 모습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들임은 기쁨이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엣, 엣 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조를 제하고 보니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니보다 끝없이 부끄러웠다. 같이 털어주던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섰는데 빈 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들어오는 건 진정 열없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응칠도 5년 전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집까지 있었다. 밤마다 아내와 마주 앉으면 살림을 늘리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궁리에 궁리를 덧보탰다. 하지만 아무리 죽살이를 쳐도 농사로 남은 것은 ‘남의 빚’뿐, 결국 시늉뿐인 세간살이를 빚잔치로 넘긴 다음 유랑길에 나선다. 당사주 그림책처럼 세상인심이 너덜너덜해진 시대에서 끈 떨어진 꼭두각시 신세의 가족이 어디로 가겠는가.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가족은 서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림은 바로 응칠 가족이 살던 집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는 장면이다. 응칠은 직심스러운 성격답게 걸음걸이에 단호함이 실렸는데, 도톰하고 동그람한 낯반대기의 아내는 소태 같던 농촌의 삶도 행복이었다고 뒤를 돌아보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아마 피 토하듯 서럽게 울고 있을 것이다. 하늘도 슬픈 것일까? 몇 낱 별빛마저 무색하게 지워졌고 냉염한 달빛은 속이 시린지 산자락과 들을 궁청색으로 깊이 물들이고 있다. 아이의 숨소리가 메아리로 울릴 지경으로 고요하다. 고통의 앙금 같은 능선의 잔주름이 자잘한 음률의 가락을 타는 듯하고 달빛에 물든 고샅길은 창호지처럼 창백하다. 새벽이 깊었으니 머지않아 멀리서 닭이 홰치는 소리도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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