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정은]헨리 키신저, 19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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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구부정하고 어눌했다.
때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지난달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비판하고 중동지역의 분쟁 확산을 경고하는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난해 19번째 저서를 내고 최근까지도 각종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해온 키신저의 행보는 100세라는 나이에도 거뜬히 계속될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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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의 전설’, ‘죽(竹)의 장막을 열어젖힌 미중 외교의 상징’, ‘동서 데탕트 외교의 주역’…. 30일 타계한 키신저에게 따라붙는 헌사는 끝이 없다. 국익을 앞세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냉전시대 미국 외교의 밑그림을 그려낸 게 그다.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칭했던 그는 1,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역사와 세력 구도,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에 천착했다. 핑퐁 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과의 세력 균형을 시도한 외교 구상에는 이런 역사적 식견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갈등, 중남미 정쟁까지 키신저가 현직에서 다뤄 보지 않은 글로벌 외교 현안은 없다. 기록해야 할 내용도 많았는지 그가 생전에 낸 회고록들의 분량만 3800페이지에 달한다. 퇴임 후까지 합쳐 그가 조언한 미국 대통령은 12명. 닉슨 행정부 때부터 유지돼온 대중 정책 기조를 뒤집어버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중국과의 물밑 통로로 그를 활용하려 했다.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놓고 “1971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키신저의 방식을 따라했다”는 학계 분석도 있다.
▷미국 외교안보를 좌지우지해온 거목이 100세까지 장수한 기록은 전례 없는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50년간 봉인되는 기밀문서들이 그의 눈앞에서 해제돼 버린 것이다. 비정부기구(NGO) 등의 요구에 따라 국무부가 공개한 수천 페이지 분량의 녹취록에는 “소련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우려이지 미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같은 냉혹한 발언들이 담겨 있었다. 미국의 대만 정책 선회 같은 민감한 결정 과정부터 기자들과 나눈 밀담까지 그대로 공개된 것은 그에게는 꽤나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키신저가 95세부터 인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았던 것은 인공지능(AI)이 세계 외교안보에 미치는 영향 연구였다. 그는 올해 에릭 슈밋 전 구글 CEO와 함께 쓴 책에서 핵무기보다 대응이 어려운 AI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를 관리할 국가기구 설립과 전략 독트린 마련 등을 제언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터지는데 미중 갈등은 심화하고 신기술의 위협까지 커지는 세상, 키신저의 경륜과 조언이 그리운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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