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의 장막 열고, 데탕트 시동…‘탈냉전 설계’ 미 외교 거목 지다
뼛속까지 현실주의 정치 신념
미·중 ‘핑퐁’ 중동 ‘셔틀’ 주도
국익 ‘우선’ 인권 ‘경시’에 비판
한반도 ‘교차승인’ 제안하기도
냉전 시기 미국 외교를 주도하며 대통령에 필적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100세. ‘핑퐁 외교’를 주도하며 미·중관계가 전인미답의 장으로 내딛는 데 기여한 키신저 전 장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중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전략경쟁의 굴레에 빠진 시점에서 세상과 작별하게 됐다.
1923년 독일 퓌르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고인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절정에 이른 1938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고인은 미국에서 출생하지 않은 이로선 처음으로 국무장관에 오른 사람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모교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학자의 길에서 벗어나 현실 외교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기존의 대통령 외교 참모들과 달리 그는 미국의 외교전략은 물론이고 나아가 국제질서를 설계, 재편하려는 야심까지도 숨기지 않았다. 그 결과 그가 닉슨 행정부와 뒤이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는 이전에 보지 못한 격변을 맞이했다. 미 역사상 고인처럼 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임한 사례 또한 전무후무하다.
뼛속까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신봉한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동원할 수 있다는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특히 강대국 간 세력균형 실현이야말로 국제체제의 안정을 이룩하는 길이라고 봤다. 그는 이러한 신념하에 미·소 냉전의 양극 체제에서 소련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등 공산 진영과의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데탕트’에 시동을 걸었다.
수십년간 가로막혔던 ‘죽의 장막’을 열어젖힌 중국과의 외교는 키신저 전 장관의 대표 업적으로 꼽힌다.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성사시켜 미·중 수교(1979)와 중국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대전환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당시 주석과 함께 서명한 대만 지위 변경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상하이 코뮈니케’는 수십년간 미·중 양자 관계의 기틀을 이루는 문서로 기능했다.
소련과도 군축협상을 시작해 미·소 데탕트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1969년부터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된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은 3년 만인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SALT I)으로 결실을 맺었다. 냉전하의 미·소 양국이 핵탄두 개수를 제한, 동결하는 합의를 도출한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도 체결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동 갈등의 ‘해결사’ 노릇도 했다. 1973년 국무장관 취임 2주 만에 발발한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당시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오가며 휴전을 유도했다. 그의 행보에서 ‘셔틀 외교’라는 말이 유래했다.
같은 해 그는 미국과 남·북베트남 사이 종전을 선언하는 파리평화협정을 도출했다는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평화협상 중에도 미군이 하노이 공습을 계속하고, 특히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해 은밀한 폭격을 감행한 사실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노벨위원회 측 위원 2명이 그의 수상에 항의해 사퇴했고, 공동 수상자인 북베트남 측 협상 대표 레둑토는 평화가 실현된 이후 수상하겠다며 거부했다. 키신저 전 장관도 시상식에 불참했다.
이처럼 철저한 현실주의 이론에 입각한 ‘리얼폴리티크’를 전면에 내세운 ‘키신저 외교’에는 명암이 뚜렷하다. 공산화 저지를 내세워 칠레 등 남미 지역의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배후 조종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미국 민주당 등에선 국익만을 앞세워 도덕, 가치 등을 배격하는 그의 외교 방식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지난 5월 그의 100세 생일 축하연에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국무부 측은 “두 사람은 관점이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주도한 중국과의 수교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는 데는 미국 내에서는 이견이 거의 없지만, 최근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서 그의 대중국 전략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퇴임 후 그의 거듭된 중국 방문을 두고 ‘친중’ 행보라고 비판하거나 중국의 영향력에 포섭됐다는 식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는 한반도 문제도 강대국 간 세력균형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교차 승인’ 방식을 통해 남북 분단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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