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 "후속작 없다면 미완성 작품 신세"

퀄리티는 만족했다. 추억도 떠올리고 당시 감성도 온전히 보존됐다. 다만 정말 기대한 탓일까. 스토리 분량이 아쉽다. 더 세밀하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기에 다음을 간절하게 원한다.
그토록 기다렸던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을 본 소감이다. 디지몬 어드벤처와 파워 디지몬은 기자의 어린 시절을 웃음으로 채워준 애니메이션이다. 친구들이 포켓몬을 외칠 때 홀로 디지몬을 외치는 독고다이 행동을 했던 기억도 여전히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디지몬과 멀어져 세이버즈 이후 시리즈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 리부트, 라스트 에볼루션 등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시리즈 후속작은 모두 챙겨봤다.
한동안 어드벤처 시리즈 후속작만 줄줄이 등장했다. 만족감, 실망감과 별개로 어드벤처 시리즈만 출시하니까 문득 파워 디지몬 시리즈가 보고 싶었다.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 라스트 에볼루션에서도 파워 디지몬 주역들은 잠깐 보여주고 넘어간 탓에 그 갈증이 계속 심해졌다.
일본에서 지난 10월 27일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반가웠다. 한국도 개봉할까 찾아봤다. 다행히 11월 29일 개봉한다고 알려져 손꼽아 기다렸다.
개봉 당일 관람을 위해 1주일 전 예매 페이지를 확인했다. 평일이니까 좌석이 여유로울 거라는 생각은 제대로 빗나갔다. 용산 등 가까운 지역 CGV를 찾아본 결과 점심 시간에도 좋은 자리는 매진됐다.
"파워 디지몬이 이 정도 인기였나"라며 새삼 감탄했다. 결국 집과 먼 지역 CGV에 예매했다. 드디어 찾아온 11월 29일.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갔는데 꽤 많은 관람객이 자리를 채웠다. 덕분에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관람할 때 의도치 않게 느껴지는 부끄러움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좋았다.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레볼루션에서 수많은 비난을 받아서 그런가 원작 설정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눈에 보였다. 그래서 추억을 더 새록새록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선함이 떨어졌다. 극장판이라 분량도 한정되니까 그동안 원했던 내용도 전부 나오지 않았다. 만족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솔직히 파워 디지몬 주역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스토리를 위해 차라리 디지몬 어드벤처 후속편이었다면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 작화 "퀄리티 만족스러워"


라스트 에볼루션에서도 느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디지몬의 작화가 점점 발전했다.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의 작화는 라스트 레볼루션 작화에서 발전보다 정제됐다. 퀄리티 적으로는 비슷하다.
"보다 깔끔하게 만들거야"라는 제작진의 의지가 엿보였고 그 결과 색감, 배경, 명암 처리, 윤곽선, 애니메이션 동작, 이펙트 등 작화 붕괴 요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스토리와 전개 방식 관계 없이 바라봤을 땐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2세대 아이들의 성장한 모습, 오프닝 BGM, 이치죠지 켄과 이노우에 미야코의 은은한 러브라인, 모토미야 다이스케과 브이몬의 환상적인 케미, 디지몬들의 진화 장면 등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토리는 지극히 선형적이다. 한 사건만 직관적으로 다루니까 디지몬 시리즈를 꾸준히 봐왔던 관람객이라면 다음 내용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킬링타임에 어울리는 방식이지만 깊게 생각할 만한 요소가 없어 보는 내내 심심하기도 했다.
분위기는 그 과정 속에서 수시로 전환된다. 밝았는데 어두웠다가 다시 밝아진다. 누군가에겐 다소 짜증날 수 있는 모토미야 다이스케가 분위기 전환의 주역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와 브이몬의 티카타카 대사는 다른 주인공들에게선 볼 수 없는 케미라 정말 만족스러웠다.
물론 루이의 부모가 웃코몬때문에 사망했는데 "웃코몬이 불쌍하다"며 절대 디지몬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야마기 히카리의 대사는 사이코패스 수준으로 뜬금없었다. 트라이에서도 그렇고 "제작진이 야가미 히카리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소 고어한 장면도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징그럽고 무서운 장면이 아닌 분노, 공포, 슬픔, 감동 등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장면이다.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에서 칭찬점을 주고 싶었던 요소였다.
■ 디지몬 진화 연출 "원작 감성"


디지몬 시리즈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진화 장면이다. 디지몬이 진화할 때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BGM을 먼저 들으면 이후 과연 어떤 새로운 연출로 진화를 할까 기대감이 차오른다.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의 진화 연출은 원작에서 세련미만 더한 연출로 제작됐다.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엑스브이몬, 스팅몬의 진화 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과거 추억을 확실하게 떠오르게 만드는 디자인이다.
파일드라몬 조그레스 진화는 3D 연출에서 2D 연출로 변경됐다. 오히려 어색한 CG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더 마음에 들었다. 어렸을 때 원작 첫 파일드라몬 조그레스 진화를 보며 감동했는데 당시 기억 때문일까. 조그레스 진화가 나타나니까 감동이 벅차올라 눈물이 살짝 맺혔다. 조그레스 진화 시 빛이 각 디지몬 형상으로 구현된 디테일도 인상적이다.
새로운 진화체는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에서는 완전체에서 마감됐던 디지몬들의 궁극체가 등장했다.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아구몬과 파피몬의 키즈나 진화체를 보여줬다.
이번 작품에서는 원작 최종 진화 형태인 황제드라몬, 실피드몬, 토우몬만 등장한다. 적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물리쳐야 할 디지몬의 진화체도 나타나지 않았다. 늘 있었던 것이 없어서 그런가 막상 새로운 진화체가 없으니까 허전했다.
■ 주연 분량 "신규 캐릭터로 줄어들어 아쉬워"


디지몬 극장판은 언제나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진행한다.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에서의 모치즈키 메이코와 메이쿠몬이 있다.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에서는 오오와다 루이와 웃코몬이 등장한다.
먼저 말해둘 건 오오와다 루이는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와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의 신규 인물들처럼 뻑뻑한 고구마 역할을 하진 않는다. 이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다. 한정된 분량에서 오오와다 루이의 서사를 풀어내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주연들의 분량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주연 중 리더인 모토미야 다이스케와 이치죠지 켄의 분량을 더 챙겨야 하니까 이노우에 미야코, 히다 이오리, 이치죠지 켄, 야가미 히카리, 타카이시 타케루의 분량은 더 줄어들었다. 이는 후술할 전투 장면이 다른 작품들과 달리 매우 짧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나마 오오와다 루이의 서사가 디지몬 어드벤처, 파워 디지몬 전체 서사에 전혀 연관되지 않아 몰입감을 저해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원작 및 라스트 에볼루션 설정과 맞지 않는 불협화음과 억지가 있긴 해도 "아! 이래서 선택받은 아이들이 많아졌던 거였네"라고 느껴질 만한 트리거를 보여준다.
■ 전투 "밋밋하지만 주연 디지몬의 가치 보존"


전투에서는 제작진이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느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의 전투는 정말 짧다. 주인공들을 위협할 만한, 위기에 봉착시킬 만한 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와 라스트 에볼루션에서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라스트 에볼루션을 예로 들어보자. 오메가몬은 워그레이몬과 메탈가루몬 두 궁극체가 조그레스 진화한 최강의 디지몬이다. 게다가 수많은 적을 물리치면서 경험치도 쌓아왔다.
그런데 매번 패배한다. 물론 상대 디지몬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계속 진화하고 강해지니까 그럴 수 있지만 오메가몬이 전투력 측정기로 느껴질 만큼 그 패턴이 동일했다. 이를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에서는 배제했다.
적이라고 할 만한 디지몬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하이퍼 모드로 진화한 황제 드라몬의 가치를 지켜냈다. 일반적인 완전체와 죠그레스 진화 완전체의 격차를 알 수 있는 장면도 재밌다. 황제드라몬 외 나머지 디지몬들은 각각 성숙지로 진화해 웃코몬의 촉수를 상대한다.
당연히 성숙기인 가트몬은 완전체인 엔젤우몬으로 진화한다. 이때 엔젤우몬이 촉수에 너무 쉽게 당한다. 하지만 실피드몬으로 조그레스 진화 이후에는 쉽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각 진화의 파워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다만 위기가 없으니까 긴장감도 줄었다. 전투 장면이 길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만약 웃코몬에게 황제드라몬이 당했다면 분노가 차올랐을 것이다. 후속편을 만드는 입장에서 고민이 정말 많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 지 궁금하다.
■ 복선 "또 제대로 회수하지 않네"


디지몬 후속편이 출시될 때마다 해소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다. 정말 다양한 복선들을 설치해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는 건 매우 한정적이다.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라스트 에볼루션과 원작 결말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라스트 에볼루션에서 어떻게 됐는가 야가미 타이치와 이시다 야마토 그리고 타케노우치 소라는 아구몬, 파피폰, 피요몬과 이별한다. 파워 디지몬 원작 결말에서는 이들이 다시 만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가미 타이치의 모습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라스트 에볼루션과 연관된 이야기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쿠키 영상이라도 제공했으면 만족스러웠을 텐데 이마저도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퇴장하면서 다른 관람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를 기대했던 팬들도 적지 않았다.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릴 만한 장치를 많이 만들긴 했지만 정작 복선을 해결하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다.
웃코몬의 존재도 확실하게 풀리지 않았다. 웃코몬은 자신을 위대한 자와 연결된 디지몬이라고 소개한다. 이를 듣고 선택받은 아이들은 곧바로 '호메오시스타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루이와 웃코몬의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만 보여주다가 이를 놓쳤다. 호메오시스타스와 어떻게 연관됐는지, 웃코몬이 루이를 갑자기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 등 여러 요소가 전부 수수께끼다.
마지막 쿠키 영상은 루이의 손에서 디지몬 알이 흔들리는 장면이다. 헤어졌던 웃코몬과 다시 만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스토리에서 "루이와 웃코몬은 다시 만날 거야"라고 암시했다. 굳이 이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정말 보여줄 쿠키 영상이 없어서 이 장면을 넣은 것이 아니라면 루이와 웃코몬이 주연 라인업에 합류해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는 의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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