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의 장막' 연 美외교 전설 … 키신저 별세

윤원섭 특파원(yws@mk.co.kr) 2023. 11. 3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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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데탕트 이끈 前국무장관
케네디부터 바이든까지
대통령 12명에 외교자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냉전시대 세계질서를 재편한 것으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는 "존경받는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인 헨리 키신저가 29일 코네티컷주 켄트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국무장관이었다. 1961년 취임한 존 케네디 대통령부터 조 바이든 현 대통령까지 총 12명의 대통령에게 외교 자문을 제공했다. 핑퐁 외교를 앞세워 '죽(竹)의 장막'을 연 미·중 외교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미·중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그의 방중은 이듬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1979년 양국 수교의 초석이 됐다. 지난 7월에도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고, 미·중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옛 소련과 대화를 통한 데탕트 전략을 주도한 것도 키신저 전 장관이다. 1969년부터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 협상을 시작해 1972년 협정을 맺었다. 양국 간 맺은 첫 핵무기 제한 조약이었다. 베트남전 종전도 이끌어냈다. 그는 수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인 끝에 1973년 미군 철수를 통해 남북 베트남 간 평화 정착의 토대를 마련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이 공로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월남전 종전 이끌어 노벨상 한반도 평화구상에도 기여

외교 전설 헨리 키신저 타계

29일(현지시간)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장관 재직 시절인 1973년 11월 24일 당시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는 다양한 별명이 따라다닌다. '외교의 전설' '미국 외교의 설계자' '데탕트의 대명사' 등 냉전 시대 조정자이자 중재자의 면모를 강조한 것이 많다. "외교는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예술"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이해하려면 히틀러 저서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어야 한다" 같은 화제의 어록도 여럿 남겼다.

그는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미국이 아닌 상대국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부분도 있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인권 등 중요한 부분에서 미국의 가치를 저버렸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대한 오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중국과 수교를 맺고 미국이 지원하면 경제적 개방으로 중국이 민주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되레 공산당 체제를 공고히 해 사실상 독재의 발판을 만들어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스톤'은 인터넷판 부고 기사에 "미국 지배층에게 사랑받은 전쟁범죄자 헨리 키신저가 마침내 죽었다"고 적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책임이 키신저 전 장관에게 있다는 비난이다.

유대인인 그는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건너갔다. 1954년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정치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인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 1973년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주미대사를 지낸 안호영 전 외교부 1차관은 "키신저 전 장관은 '힘의 균형'을 극도로 잘 활용한 외교 전략을 연구했고, 이는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베스트 모델'이라는 신념을 지녔다"고 말했다.

전 세계 리더들의 추모도 잇따랐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은 외교 문제에서 신뢰할 만하며 뛰어난 목소리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 그의 봉사와 충고에도 감사하지만 가장 고마운 것은 우정"이라고 애도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미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포함해 지역 평화와 안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조전을 보내 키신저 전 장관을 애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조전에 "키신저 박사는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 좋은 친구"라고 적었다. 이어 "반세기 전 그는 탁월한 전략적 안목으로 중·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역사적인 공헌을 했고 이는 양국에 이익이 됐을 뿐 아니라 세계를 바꿨다"며 "'키신저'라는 이름은 영원히 중·미 관계와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 밝다.

그는 한반도의 역사적 장면에도 자주 등장했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개최를 제안한 것도 그다. 자주 한국을 찾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만났다. 이 공로로 2009년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을 받았다.

이날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아산정책연구원은 장문의 추모글을 올려 고인을 애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정몽준 아산정책연구원 명예이사장과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왔다.

[뉴욕 윤원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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