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본’을 향한 17세기 예술지상주의자의 꿈

서울앤 2023. 11. 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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㉙ ‘일본 예술’로 ‘중국 중심주의’에 맞선 예술인 마을 고에쓰지(光悅寺)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고에쓰지 절’ 다이쿄안(大虛庵) 암자와 대나무 울타리. 다이쿄안은 혼아미고에쓰(本阿弥光悅)가 호로 삼은 그의 거처이고, 대나무 울타리는 ‘고에쓰가키’(光悅垣)라 불릴 만큼 명품으로 꼽힌다. 이 둘이 고에쓰지 경관을 대표한다.

“고요한 정원” 고에쓰지 절, 본래 예술촌

겉은 일반 집, 숲 안은 ‘예술공동체’ 모습

“근세 일본 최고 문화인” 혼아미고에쓰

따르는 장인 이끌고 들어와 작품 제작

중국 중심 주자학 반감, ‘일본 문예’ 추구

“과거 뛰어넘는 명인 배출” 후진 양성

대중 위해 삽화, 밑글씨 넣은 책 창안도

“고에쓰의 자각 모여 메이지혁명 낳아”

17세기 초 교토에 ‘예술인 마을’이 있었다. 도예, 공예, 회화 등에서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살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장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확신을 가진 한 만능 예술가가 지었다는 이 예술촌이 궁금해 교토 서북 고지대 동네 다카가미네(鷹峯)를 찾아갔다. 교토 서쪽을 남북으로 잇는 센본도리 길 북쪽 끝부분에 불교대학이 있고, 거기부터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도카이(東海)자연보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에 고에쓰지(光悅寺)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예술촌은 ‘촌장’ 혼아미고에쓰(本阿弥光悅. 1558~1637) 사후 일련종 사찰이 되어 오늘날까지 그 면모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 길로 접어들면 2018년에 세웠다는 ‘린파(琳派)400년기념비’와 마주친다.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쓰로부터 이 땅을 받은 혼아미고에쓰는, 일족과 장인들을 이끌고 들어와, ‘고에쓰무라’(光悅村)라고 불린 예술촌을 세우고 뛰어난 예술작품을 생산했다. 고에쓰로부터 이어진 미의 흐름은, 나중에 ‘린파’라고 불렸으며, 오늘날까지 일본 미술에 다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린파’의 일본 미와 미의식이 다음 세대를 담당할 젊은이들에게 이어져 뛰어난 예술이 창조되기를 염원하며 이 기념비를 세운다.”

비문을 읽고 나니 더욱 ‘고에쓰무라’가 보고 싶어져 발길을 서둘렀는데, 얼마 가지 않아 길가에 표지판이 나타난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찰로 지은 게 아니라, 가로변에서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집들이 나오는 일종의 숨은 공동체 구조로 지었음을 짐작게 한다.

일본 유명 화파인 ‘린파’(琳派)400년기념비. ‘차후에도 옛 명작에 못지않은 명인들이 언제라도 나오기를 바란다’는 혼아미고에쓰의 말을 새겨놓고 있다.

고에쓰지는 진정 고즈넉한 ‘절’이다. 하도 고요해 여름과 가을에는 녹음 속에 풀벌레 소리만 들리고, 봄겨울에는 꽃과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빛깔이 소리 없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고 할까. 오솔길을 걸어와 먼 히가시야마 산봉우리들과 가까이는 다카가미네 3연봉을 바라보며 정적 속에 안기고 싶다면 고에쓰지가 바로 그 바람을 들어줄 것이다. 산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참도는 제법 길다. 돌을 깐 좁은 길이 단풍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의 터널을 지나 중문으로 들어서는 구조이다. 인증샷을 찍으려 붐비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형식적이겠지만 촬영 금지 팻말을 세워놓고 있다. 불당을 지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면 다이쿄안(大虛庵. 20세기 초 재건축), 삼파정(三巴亭), 료적헌(了寂軒), 교수헌(翹秀軒) 등 고에쓰가 지은 다실들이 숲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다. 각각이 다른 방향 속에 나름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고에쓰의 가호를 딴 혼아미암. ‘아미’는 일본 중세 이후 공예, 그림, 음악 등 예술 계통이나 잡역에 종사하며 주군을 모시는 직능 집단을 가리킨다. 혼아미는 칼을 감식·연마하는 집안이다.

고에쓰지의 명물은 고에쓰가키(垣)라고 불리는 대나무 울타리이다. 굵은 대나무를 마름모꼴로 엮은 담장이 뒤로 갈수록 키가 낮아지는 게 누운 소 같다고 해서 가규가키(臥牛垣)라고도 불린다. 단풍나무와 싸리, 억새로 뒤덮인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다이쿄안의 지붕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경내 왼쪽 깊숙한 곳에는 고에쓰의 무덤이 있다. 숲이 무덤을 감싸고 있는데, 묘비 위로 비쳐드는 한 줄기 햇빛이 고에쓰에 대한 후예들의 존경심을 상징하는 듯하다. 매봉(다카가미네)을 관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수헌을 지나면 맨 안쪽에 혼아미암이 나온다. 멀리 히가시야마 연봉 아래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고에쓰는 57살 때 이곳을 짓기 시작해 80살에 죽을 때까지 예술가로서, ‘아트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 했다.

혼아미 암자 앞에서는 멀리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먼 산봉우리들이 히가시야마(東山) 산이고, 오른쪽은 우리말로 매봉인 다카가미네이다.

린파400년기념비에는 ‘고에쓰 행장기’에 실려 있다는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후에도 과거의 명작에 못지않은 명인이 언제라도 나타나기를.”

혼아미고에쓰는 17세기 전후 교토가 배출한 최고의 문화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서예의 달인으로 유명했고 도예, 공예, 회화 등 거의 예술 전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선보였다. 그의 도자기와 칠공예, 글씨, 그림 중에 일본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명품이 수두룩하다.

혼아미는 그의 가호인데, 쇼군과 다이묘의 도검을 감정하고 수리하는 집안이었다. 그 자신도 도검 전문가로서 입신을 시작했다. 귀족과 무사계급으로부터 은근한 멸시를 받았지만, 예술의 힘으로 상위 계급과 대등한 ‘자리’를 획득했다. 당시 민간자본으로 간행된 출판물 ‘사가본’에는 민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판화그림과 밑글씨가 들어갔는데, 이 또한 고에쓰의 발상이었다.

고에쓰지 참도. 길게 이어진 부석을 밟으며 중문을 지나면 법당이 있고, 그 너머에 감춘 듯한 7개의 다실이 오솔길로 이어져 있다.

교토의 대부호 스미노쿠라 소안이 이끈 사가본 출판사업 참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새롭게 시도한 것이 이 예술인마을 건설이었다. 혼아미고에쓰는 그 시대에 왜 ‘예술가를 위한 마을’을 지었나? 2021년 60쇄를 찍은 교토 안내서의 고전 <교토>에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키워드가 인용돼 있다. 우선 혼아미고에쓰 자신의 생각.

“학문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문예는 경시한다. 요즘 떠들썩한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무리들은 쇼토쿠 태자를 비방하고, <쓰레즈레구사>(徒然草)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헐뜯는다. 그러나 주희는 유풍(遺風)을 따랐으니, 우리는 그것이 우스울 뿐이다.”(하야시야 다쓰사브로, <교토>, 이와나미신서, 1962)

이것은 무슨 말인가. 너희 어용 주자학자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 정치체제를 확립한 자기 나라의 뛰어난 정치가를 깔보고 유수한 일본 고전문학들을 천시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떠받드는 주자는 정작 자기 전통을 겸손히 따랐다. 우습지 않은가, 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그에 대한 타인의 평가이다.

혼아미고에쓰 무덤. 숲으로 둘러싸인 무덤의 묘비 위로 한 줄기 햇빛이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는 듯했다.

“고에쓰라는 사람, 서예에 뛰어난 사람으로만 아는데, 그는 타고난 훌륭한 인성 위에 한번 배우고 들은 것은 잊지 않는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을 보면, 성인과 현인의 도를 배운다면서 처세의 도구로 삼는 이가 많다. 고에쓰는 평생 그런 처세법을 알지 못했다.”

하야시야 선생은 이에 대해 “‘처세법’이란 바꿔 말하면 봉건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권력에 순응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고에쓰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진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도피했다”며 ‘객관적’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고에쓰는 학문의 지위를 독점하고 ‘일본적’인 것을 폄하하는 주자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중국 지상주의에 대항해 일본의 고전과 예술을 발굴하고 발전시켜 일본 독자의 문예전통을 키워가고자 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예술인 마을’의 건설이었다. ‘가라모노’(唐物. 중국 수입품)를 끼고 알은체를 하는 상류층의 비위를 맞추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산속에 들어가 동지와 제자들을 독려해 가장 일본적인 미의식을 탐구하고 생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명한 동양미술품 수집가 찰스 랭 프리어(1854~1919) 기념석. 비를 세운 뜻은 모르지 않겠으나, 왠지 ‘과공비례’(過恭非禮)의 느낌이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일본은 14~15세기 무렵 ‘일본만의’ 고유 정서를 갈구하기 시작했고, 16~17세기가 되면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일본 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력으로 분권정치를 통한 생산력의 비약과 임진왜란 같은 지배자의 폭력이 있었지만, 자각과 계몽을 통한 민중의 문화적, 경제적 성장이 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뛰어넘는 명인을 배출한다’는 고에쓰의 꿈과 의지가 그것을 웅변한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통해 환골을 시작했으나, 탈태는 오로지 자신의 힘이었다. 그 이백수십여 년의 혁신과 축적이 메이지유신이라는 ‘무혈의 자기 혁명’을 성취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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