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훈 제주지사가 해야 할 일
[전국 프리즘]허호준 전국부 선임기자
숨죽여 산 세월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달빛에 의지해 벌초하러 다녔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먹고살기 위해 고깃배 밑창에 숨어 대한해협을 건넜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절망의 바다에서 남몰래 소리 없는 울음을 운 세월이었다.
40년 세월이 흘러 1980년대 후반에야 민주화 운동과 함께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도 본격화됐다. 시민사회와 청년·학생들이 주도하고, 지역 정치권과 유족들이 합세한 운동은 1999년 12월 4·3특별법 국회 여야 합의 통과로 결실을 보았다.
4·3특별법에 따라 2008년 설립된 제주4·3평화재단이 최근 제주 사회의 논란 중심에 섰다. 4·3평화재단은 제주도가 설립한 일반적인 도 출자·출연기관과 성격이 달랐다. ‘관 주도’인 일반 출자·출연기관과 달리 4·3평화재단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4·3특별법은 그동안 여러차례 개정을 거쳤다. 특히 4·3 희생자에게 보상할 길을 연 2021년 2월 특별법 전면 개정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오영훈 제주지사의 역할이 컸다. 오 지사는 대학 시절이던 1993년 10월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 의장으로 도민 1만750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4·3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국회 대정부질문 때 4·3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도지사가 되고 난 뒤 재단의 독립성이 흔들리고 있다. 논란은 제주도가 지난 2일 재단 이사회와 논의 없이 도지사의 이사장·이사 임명권을 담은 제주4·3평화재단 조례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입법예고하면서 시작됐다. 현재는 재단 이사회가 이사장 후보를 선출하고 도지사의 승인을 받는다. 이사회는 이사회 의결로 선출한다. 이에 앞서 공개 모집과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를 거쳐야 한다. 임추위는 도 추천 2명, 도의회 추천 3명, 재단 추천 2명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지금도 제주도의 영향력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22일 끝난 입법예고 기간 동안 논란은 더 커졌다. 조례 개정안 입법예고 뒤 고희범 재단 이사장이 사퇴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어 ‘4·3의 정치화’를 언급했고, 이에 제주도가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사회 진영과 일부 4·3 관련 단체, 재단 이사회는 조례 개정안을 비판하는 성명서 등을 잇달아 냈다. 일부 단체는 침묵을 지켰다. 제주도의 일방주의가 4·3 진영을 갈라치기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와중에 천주교 강우일 주교가 오 지사와 함께 맡고 있던 제주평화인권헌장 제정위원회 공동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 제주도 인권 논의의 장에서 상징적 인물인 강 주교의 사퇴는 제주도에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증폭되자 제주도는 지난 27일 오 지사 주재 도정현안 공유 간담회에서 조례 개정안 수정 방침을 밝혔다. 이사장 임명 전 이사회의 의견 수렴을 의무화하고, 이사는 이사장이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침을 밝힌 것도 일방적이었다. 도가 검토하는 ‘이사회의 의견 수렴’도 의결 구조가 있는 이사회의 특성상 모호하다. 4·3 운동의 정신은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이다. 그 정신에 비춰 개정안 입법예고부터 후속 조처까지 제주도의 일처리는 미숙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개정안에 재단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운영을 명문화해야 한다. 재단 이사장과 이사를 자율적으로 선임하도록 보장하고, 재단과 함께 발전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대학 시절부터 4·3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오 지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어떤 도정이 들어서든 재단이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물론 재단 이사장의 책임성이나 투명경영은 공적 기관으로서 당연하다. 재단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될 때 다양한 기념사업과 추가 진상조사도 탄력을 받는다. ‘4·3의 완전한 해결’은 아직 갈 길이 남았다.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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