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삼 년을 준비해온 속엣말”[김정수의 시톡](27)

입력 2023. 11. 3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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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량 첫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대학에 다닐 때, 국어학 과제 중 하나가 유행어를 수집해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참새 시리즈’에 이어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했지요. 지금으로 치면 ‘아재 개그’쯤 될 듯합니다. 시중에서 유행하는 말을 수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국어대사전을 펼쳐 ‘정수’를 찾아보니, 20개쯤 됐습니다. 그걸 옮겨 쓰고는 ‘정수(正洙): 나’라고 끝에 추가해 제출했습니다. 이것도 언어유희의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미량에서 미량까지



김미량 시인(위)과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표지 | 달아실 제공



김미량 시인(1970~ )의 첫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맨 앞의 시는 ‘미량’, 맨 뒤의 시는 ‘다시, 미량’입니다. 미량으로 열고, 미량으로 닫지요. 의도적인 배치입니다. 미량(微量)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적은 분량입니다. 동시에 ‘미량’이라는 이름의 시인을 지칭합니다. 좁게는 시인으로 활동한 14년을, 넓게는 생애를 의미하겠지요. 미량이라는 단어에는 자연스럽게 ‘독(毒)’이 연상됩니다. ‘나는, 나의 시는 미량이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은 아닐까요.

시 ‘미량’은 “어떤 맛일까, 미량은”으로 시작합니다. 궁금하기는 한데 “내 혀는 몸 어디에도 닿지 않으니/ 꽃밭에 누워 하품하는 나를 맛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건 “인기척에 놀란 벌떼와는 좀 다른”데, “미량이어서/ 이마만 동그랗게 부풀었”다네요. 풀밭에 누워 있다가 벌에 쏘인 이야기일까요. 보톡스를 맞은 하루일까요. 어쨌든 미량의 독이 몸에 주입되는 순간 이전의 미량은 아닙니다. “극미량”이지만 독을 품게 됐으니까요. 시인은 “입술이 누굴 환영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면서 “방금 누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까”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또 “미안, 트림이 나왔어요”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 시에 성적 코드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요. 꽃밭에 누워 있다가 벌에 쏘이고, 이마가 동그랗게 부풀고, 트림이 나오는 상황이 임신과 출산의 중의적 표현이라면 “머릿속이 흐린 날이 너무 많”다는 건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쯤 되겠지요. “열 숟가락쯤 상상을 추가”해도 “여우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미량스럽다”는 ‘미련스럽다’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그쯤일 거”라는 표현은 “실험실에서의 하루” 같은 날들을 끝내겠다는 의미겠네요. 참으로 뛰어난 상상력입니다.

시 ‘다시, 미량’은 호수에 “하나, 둘, 셋”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생겨난 파문이 다른 “파문을 만나 서로”를 건너가지요. 왜 셋일까요. 혹시 나와 당신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닐까요. 먼저 던진 돌에 의해 생겨난 파문이 되돌아와 나중에 던진 돌에 닿지요. 그 모양을 바라보던 나는 어디서 당신을 마주치고, “어디서 (당신이) 나를 건넜는지 알지 못한다” 애써 부인합니다. 까맣게 잊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둠이 내린 호숫가에 오래 앉아 있자 “내 눈이 조금 넘”칩니다. 약간 눈물을 흘리지만, “당신과 내가 없다 해도 아침은 올 것”을 압니다. 호수에 이는 파문에도 잘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성적 표현에 숨은 뜻은

시인은 “몇 번을 멈추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왔다”(‘시인의 말’)고 합니다. “어느 날은 검은 비가 내렸고, 어느 날은 폭설이었다”고 하네요. 시 ‘초경’에서, 그동안 쓴 시를 “십삼 년을 준비해온 속엣말”이라 합니다. 가슴에 품고 있던, 남에게 쉽게 풀어놓을 수 없는 말이겠지요. “작은 몸 낮게/ 오랜 시간/ 웅크린 아이”가 초경을 하듯 쏟아놓은 부끄러운 시라는 뜻일 것입니다. “손발은 고요한데/ 파르르 떨리는 시간이 귀”를 열고, “가쁘게 몸의 숨 열리듯/ 조금씩 붉게” 울음이 터져 나온, 그런 시 말입니다. 한데 “더는 눌러둘 수 없어/ 몸에서 솟구치는 몸의 혁명”이라고 합니다. 등단 14년 만에 낸 이번 시집이 이전의 세계를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혁명의 시작’인 셈입니다.

스님에게 따지듯 하소연하는 ‘스님, 책임져요’라는 시에서는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손끝에서 나오는 빛으로/ 붉은 비를 만들 운명”을 언급합니다. “웨딩드레스를 붉게 물들면/ 하얀 발목은 놀란 표정처럼” 보이는데, “제가 가해자가 될 거”라 합니다. 붉은색은 불행이나 불운을 상징합니다. 태어나는 순간이나 결혼생활이 불행할 것이라는 암시지요. 하지만 시는 희극보다는 비극을 먹고 자랍니다. 시인의 길도 운명입니다. “핏빛이든 흰빛이든 써”보겠다는 결의를 다지지만, “어제의 몸살”과 “먹구름을 배낭처럼 메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빗방울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시가 써지지 않습니다. 고진감래라 했던가요. 마침내 “난생처음 듣는 저 우렁찬 울음소리/ 귀를 막아도 짓쳐드는 저 천 년 전의” 문장이 도착합니다. 시 한 편을 완성한 것이지요.

눈치챘겠지만, 김미량의 시에는 성적인 표현이 꽤 등장합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내 몸은// 당신의 지문으로 작동한다”(‘드라이빗처럼’), “이생에서 내가 만졌던 당신은/ 말랑말랑한 젤리 같았어”(‘마침내 낯선 계절이’), “사내와/ 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달마도를 걸다’), “잠잘 때/ 남자의 트렁크 팬티를 입어요”(‘팬티의 힘’)…. 이런 표현의 이면에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과 불안,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가령 시 ‘팬티의 힘’에서 만약 새 애인이 생긴다면, 그가 남자의 트렁크 팬티를 입었다고 뭐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버릴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남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이지요. “내 몸 위로 날 선 칼”(이하 ‘칼, 도마, 그리고 나’)이 수시로 다녀갑니다. “작은 상처”가 나고, “난도질되다가” 달아나고 싶었던 순간들을 인내합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때도” 있겠지요. “도마 위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도마 위에서 “우울한 기억”(‘악몽 한 근’)이 잘려 나갈 때, “모든 분노는 날개를 달고 가벼워”지겠지요. “혼자 지나온 사막”(‘돌아온 세계’)이 꽃밭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꽃밭에서 뒹군 두 번째 시집이 궁금해집니다.

시인의 말



어제의 심장에 돋는 새파란 시간들

이현서·미네르바·1만원

눈부신 날들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걸어 나온다. 낯선 질문들이 나비처럼 꽃잎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담양, 인향만리 죽향만리

조선의·상상인·1만원

과거가 미래를 향해 현재에 살아 있는 곳. 담양은 말로만 듣는 것보다 직접 와서 보면 안다. 왜 다시 오고 싶은지.



유령의 시간

이정섭 지음·애지·1만2000원

저녁이 머무는 시간이면 거기 머리 검은 짐승이 지나가고, 낡고 허름한 그림자가 지나가고, 물끄러미 운동장을 바라보던 한 아이가 지나간다.



난, 여름

최휘 지음·시인의일요일·1만2000원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요. 계절처럼 썩고 시대처럼 잊혀져야 하는데 넝쿨장미의 계절을 들춰 보다 앵두가 익으면 여름처럼 떠들었어요.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이어진 지음·청색종이·1만2000원

이 꿈은 옮겨갈 듯 옮겨가지 못하는 꿈이다. 너의 꿈속으로 전학 가고 싶었는데 네가 내 꿈을 따라와서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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