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만 한 보따리…망가진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9개월

김지은 기자, 박수현 기자 2023. 11. 30.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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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피싱 피해자의 딸 김모씨가 지난 9개월 동안 은행, 법원 등을 돌아다니며 받아낸 서류들. /사진=독자제공


"1억7000만원을 빼앗겼지만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구나…이런 생각 뿐입니다."

60대 피싱 피해자의 딸인 김모씨는 지난 26일 머니투데이와 전화로 대화하면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 어머니는 지난 2월 휴대폰에 전송된 문자 링크를 잘못 눌렀다가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베트남) 6명, 한국인 3명에게 약 1억7000원을 빼앗겼다. (이전 기사 참고: [단독]'우리 공주' 문자에 2억 증발…통장 찍힌 사람 찾으니 "정당한 돈")

김씨는 지난 9개월 동안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휴직계를 내고 한국에 급하게 돌아왔다. 김씨는 "돈도 돈이지만 제 시간도 플러스 알파로 들어가서 낭비된 느낌이 있다"며 "저는 현재 이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만약 한국에 직장도 다니고 아이까지 키웠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가 문자 링크를 클릭한 뒤 박모씨, 유모씨 등 9명에게 수천만원의 돈이 입금됐다. /사진=독자제공


김씨에 따르면 피싱범의 수법은 상당히 교묘했다. 그는 딸인 척 행세하며 김씨 어머니에게 문자 링크 하나를 눌러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원격 프로그램을 설치해 네이버 인증서를 다운받고 그 인증서를 이용해 더 중요한 인증서들을 재발급 받았다. 피싱범은 딸인 척 어머니와 주고 받았던 문자들도 모두 삭제하고 사라졌다. 그렇다보니 초창기 김씨는 피의자 신원을 특정하고 증거자료를 수집하는데 애를 먹었다.

당시 김씨가 알고 있던 유일한 정보는 통장에 찍힌 계좌번호와 이름 정도였다. 김씨는 가장 먼저 은행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상대방 계좌에 대해 지급 거래 중지를 유지해달라고 말했지만 은행은 정확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지급정지를 풀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씨가 "그 사이 돈이 빠져나가면 어떻게 하느냐", "경찰이 수사 중인데 결과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은행을 법원을 통해 부당이득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 지급 거래 중지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결국 법원에 찾아가 9명에 대한 부당이득 청구 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당시만 해도 피의자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법원에 계좌번호를 적어 계좌주 주소로 소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인지세, 송달료만 200만원 정도 들었다.

법원에도 문을 두드렸지만 범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경찰은 베트남 사람 5명이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소재지 파악이 안된다고 했다. 한국인 두 명은 답이 없는 상황이고 나머지 1명인 유모씨는 자신은 정상적인 거래 활동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현재 김씨는 신원이 확인된 베트남 사람과 유씨에 대해서만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부당이득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유씨에게 송금된 금액은 총 1750만원, 베트남 사람에게 송금된 돈은 총 1800만원으로 해당 사건은 현재 2000만원 이하의 소액 사건 재판으로 분류됐다. 김씨는 "2000만원 이하는 무조건 소액 재판으로 분류돼 15분에 4개 사건을 동시에 진행한다"며 "이런 사건에서 판사가 그 내용을 면밀히 파악 하기란 쉽지 않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너무 절박하다"고 말했다.

미국 은행 거래 어플리케이션의 모습. 주민등록번호와 다르게 소셜 넘버를 적는 란이 있다. 또 보안 질문이라고 해서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만 은행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사진=독자제공


김씨는 한국의 은행 보안 시스템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허술하다고 했다. 그는 "미국은 주민등록번호와는 별도로 '소셜 넘버(사회보장번호)'라는 게 있다"며 "금융 거래 할 때, 세금 관련 일을 할 때 로그인 할 수 있는 번호가 전부 다르다. 신분증을 잃어버려도 정보가 유출될 일이 없다. 이중 보안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앱에서 은행 거래를 할 때 질문지를 따로 적어 2차 검증도 한다"며 "'어머니 이름이 뭔지' '영화관에서 가장 처음으로 본 영화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내가 저장한 답변을 입력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확인이 안되면 거래를 안시킨다. 한국은 미국과 비교했을 땐 은행 보안 시스템이 너무 간소화되어 있고 쉽게 풀린다"고 말했다.

김씨는 은행 앱에서 계좌주 이름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쉽다고 했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피싱 총책이 김씨 어머니 계좌의 돈을 베트남 사람과 유씨에게 전달할 때 교묘하게 이름만 바꿔 송금했다. 현재 총책의 신원은 특정되지도 않았고 행방도 묘연한 상황이다.

그는 "송금할 때 실계좌 이름을 바꿀 수 있는 한국 시스템이 너무 이상하다"며 "지금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보니 누가 진짜 돈을 보냈는지, 진짜 계좌 주인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 계좌 확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박수현 기자 literature1028@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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