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류 과다처방 입건 그 병원…다이어터들 새벽부터 줄섰다
효과 입소문에, 묻지마 처방으로 인기
처방 의사 재량 달려... 불법 판별 애매
23일 오전 7시 서울 구로구의 한 건물 지하 1층. 실내등도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15명 정도의 여성 무리가 벽을 따라 쪼그려 앉아 대기 중이었다. 이들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 탓에 핫팩과 무릎 담요로 몸을 감쌌고, 아예 캠핑용 의자를 가져온 사람도 눈에 띄었다.
대체 이곳에 뭐가 있길래 이른 아침부터 '오픈런'이 펼쳐지고 있을까. 여성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대상은 온라인에서 '다이어트 3대 성지' 중 하나로 명성이 자자한 A비만 클리닉이다. 얼마 전 이 병원 원장이 '의료용 마약류'를 과다 처방하다 경찰에 입건됐는데도, 다이어트약을 손에 얻으려는 고객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2분 진료 보면 '다이어트약' 뚝딱
29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구로경찰서는 21일 A클리닉 원장을 입건했다. 장기복용하면 혼수상태나 사망에 이를 수 있어 4주 이하 투약이 원칙인 향정신성의약품 '펜디메트라진'을 10여 명에게 과다 처방한 혐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A클리닉이 3년 반 동안 환자 한 명에게 무려 6,300여 정의 펜디메트라진을 내준 정황을 포착해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병원 운영에 불법 정황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정도로 다이어트 열망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날 두 번째 방문한 김모(37)씨는 "TV 고발프로그램에서 A클리닉을 다루기도 했지만, 약효가 워낙 좋아 결혼을 앞두고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온 이모(26)씨도 "손 떨림, 울렁증 등 일부 부작용은 있으나 식욕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감수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초스피드·묻지마 처방'도 이 병원이 각광받는 이유다. 체질량지수(BMI)가 정상인 기자가 10㎏을 빼고 싶다고 말하자, 의사는 2분 만에 처방전을 내줬다. 4시간을 기다려 진료를 봤으나 그는 키와 몸무게, 불면증 여부 등 기초 정보만 확인했다. 간호사도 "손끝이 저릴 수 있지만 일주일 지나면 괜찮아진다"며 간단한 부작용만 일러줬다.
당뇨약이 효험?... '과다 처방' 입증 어려워
처방받은 다이어트 약값은 12만 원. 문제가 된 마약류 식욕억제제는 없었지만, 당뇨 치료에 효과가 있는 약물 등 아홉 종류의 4주 치 알약이 들어 있었다. 한 섭식장애 전문의는 "처방전을 보니 일반 약제가 가진 부작용을 이용해 식욕 감퇴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병력이 없는 정상체중 환자에게 투약하는 건 명백한 오·남용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약사는 "펜디메트라진은 식욕억제 효과가 강해 초진 약으로 효과를 못 본 환자들에게 처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했다.
누가 봐도 의학적 관점에서 정상적 진료와 처방은 아니다. 그럼에도 A클리닉이 성업 중인 건 향정신성의약품의 '과다 처방'을 입증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식약처 규정엔 3개월 초과 식욕억제제 처방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단 치료 목적이나 '의학적 타당성'이 확인되면 허용한다. 이런 기준은 의사 재량에 따라 처방 범위 편차가 크기 마련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사실상 법원이 유죄 판결을 해야 오·남용 처방을 행정처분할 수 있다"면서 "마약류 취급 업무를 일정 기간 정지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윤흥희 한성대 마약알콜학과 교수는 "다이어트약도 반복 투약하면 중독 증상이 생길 수 있지만, 의사가 '필요해서 처방했다'고 주장할 경우 혐의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용 마약류가 최근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마약 오·남용의 주범이 된 것도 이런 허술한 시스템에 있다. 정부가 22일 발표한 관련 대책에서도 처방 및 투약금지 양과 횟수 기준을 강화하는 등 의료용 마약류 관리 체계를 시급한 개선 과제로 적시했다. 다이어트 업계 사정에 밝은 한 약사는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특정 병원에서 거절당해도 다른 곳을 찾아가는 만큼 장기복용 자체를 차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다빈 기자 answ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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