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스스럼없이 웃기는 바보가 필요하다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 2023. 11.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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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의욕 잃은 神도 웃음 통해 원기 되찾아
경기침체 등 힘든 시기 새로운 발상 필요한 때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웃지 않는 공주가 있었다. 아니, 어느 날부터 공주는 웃지 않게 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부왕은 공주를 웃게 만드는 사람에게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한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광대들이 공주를 웃기려고 온갖 수를 써보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접하고 들었던 의문은 ‘공주가 웃는 것이 왕에게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였다. 잘 웃는다는 것은 정신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지 웃지 않는 딸을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단지 공주를 웃게 만드는 일에 나라의 절반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동화의 터무니없는 설정에 뭐 그렇게 심각하게 대응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전 세계의 이런저런 신화를 공부하면서 이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는 ‘호루스와 세트의 대결’이라는 유명한 신화가 있다. 호루스라는 신과 세트라는 신이 이집트의 왕위를 두고 양보 없는 결투를 벌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신화에서 최고신인 태양신은 두 신의 파괴적인 대결을 종식시키고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는 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자 성격이 강한 신 하나가 태양신을 심하게 비난한다. 이 공격에 의기소침해진 태양신은 아침에 떠오르기를 거부한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태양신이 출근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때 온화한 암소 여신이자 성애의 여신인 하토르가 자신의 음부를 태양신에게 드러낸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태양신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후 다시 활력을 얻고 떠오른다. 현대인의 성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신격이 높은 신이 자신보다 신격이 낮은 신의 흐트러진 모습 - 혹은 해학적인 모습 - 을 보고 새로운 활기를 되찾는다는 신화소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고대 그리스의 바우보와 관련된 신화소를 들 수 있다. 신화는 이렇게 전한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인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에게 납치되자 딸을 찾아 그리스 전역을 방황한다. 긴 여행에 지친 여신이 엘레우시스에 머물 때 바우보라는 노파로부터 환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딸을 잃은 슬픔으로 침울해하는 여신을 보자 바우보는 잠시나마 여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다. 이때 바우보의 옷이 벗겨지며 성기와 엉덩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단순한 환대를 넘어선 바우보의 화끈한 배려에 데메테르 여신은 크게 웃고 다시 딸을 찾아 나설 힘을 얻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이야기와 고대 그리스의 바우보 이야기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신화가 이웃 나라 일본에도 있다.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남동생인 스사노오의 악행에 분노하여 동굴에 은둔해 버린다. 이집트의 태양신과 마찬가지로 떠오르기를 거부한 것이다. 다른 신들이 동굴 근처에 모여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아메노우즈메라는 여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옷까지 찢어가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른 신들이 모두 웃자 동굴 속에서 영문을 모르는 아마테라스는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이 없는 세상은 분명 공포와 탄식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데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었다.

대상은 다르지만 웃음에는 의욕을 잃은 태양신마저 다시 원기를 되찾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신화에서 신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마테라스가 다시 동굴로 들어가지 못하게 금줄을 쳤다. 세상에 다시 빛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도 공주의 웃음을 되돌리는 대가로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 왕의 깊은 뜻을 이해하셨으리라. 데메테르 여신과 같이 공주는 대지의 풍요를 상징한다.(동화는 심오한 신화가 주저앉은 이야기다) 공주가 웃지 않는다는 것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비옥함과 생식력이 쇠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입장에서는 전국이 황무지가 되기 전에 나라의 반이라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가슴을 활짝 펴고 큰 소리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소식은 좀체 들리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민간인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전쟁은 겨울을 더 춥게, 연말을 더 우울하게 만들뿐이다. 웃지 않는 공주 이야기로 돌아가서, 결국 공주를 웃기는 데 성공한 사람은 우리가 ‘바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이때 바보는 기존 가치관이나 경직된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를 뜻한다. 웃음기 사라지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시끄럽게 외치고 다니는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으로 우리들을 잠시라도 웃길 수 있는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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