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번스타인도 처칠도 빚어낸 ‘신의 손’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7번째 레터는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인 최초로 세계 정상급 반열에 오른 거장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전성기를 이끈 명지휘자죠. 하지만 예고편이 공개되자마자 번스타인 역을 맡은 배우 브래들리 쿠퍼의 ‘코’ 때문에 집중포화를 맞았습니다. 유대인 지휘자인 번스타인과 닮게 하기 위해 붙인 코 보형물을 보고 “유대인을 조롱했다”는 논란이 불거졌죠.
하지만 공개된 영화에서 정작 눈길을 끈 건 코보다는 주름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인터뷰하는 첫 장면에서 브래들리 쿠퍼는 노년의 번스타인을 빼닮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이자 동성애자였고, FBI블랙리스트에 올라 감시까지 받았던 굴곡진 삶의 무늬가 얼굴에 그대로 새겨진 듯했습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특별히 특수 분장을 맡은 카즈 히로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히로는 일본 출신 특수분장사로 ‘다키스트 아워’(2018)에서 배우 게리 올드만을 윈스턴 처칠로 완벽히 변신시켜 미국 아카데미 분장상을 받았습니다. 게리 올드만이 “내가 처칠 역을 맡을지 말지는 카즈 히로에 달려 있다”고 했을 정도로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특수분장의 대가죠.
생선 장수의 아들로 일본 교토에서 자란 카즈 히로는 폭력적이었던 부모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여덟살 때 본 ‘스타워즈’와 ‘고질라’가 그의 인생을 바꿔놨죠. 영화에 푹 빠져 10대 때부터 독학으로 특수 분장을 배운 그는 지역 방송국의 메이크업을 맡으면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히로는 그때부터 친구들의 얼굴에 각종 실험을 해가며 노인 특수분장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20대 중반의 앳된 청년 번스타인부터 70대 번스타인의 피부결과 깊은 주름, 늘어진 살과 검버섯까지 섬세하게 빚어냈습니다. 번스타인이 죽기 직전인 마지막 장면 촬영 때엔 이마, 코, 입술, 목, 어깨, 손은 물론 몸통 전체에 분장을 입히는 데 5시간이나 걸렸다고 하는데요. 카즈 히로는 최근 미국 버라이어티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끝나면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걸 쏟아낸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코 분장 논란에 대해선 “관객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세트와 의상을 준비하듯이, 분장도 그 일부였다. 쿠퍼를 최대한 번스타인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고 해명했죠.
그는 2020년 영화 ‘밤쉘’로 두번째 아카데미 분장상을 받고선 “일본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냐”는 언론의 질문에 “일본에선 꿈을 이루는 게 어려웠고, 일본의 문화가 싫어 미국에 왔다”고 답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이렇게 부연 설명을 남겼습니다. “일본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억압적인 문화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고, 특히 영화 산업은 예산과 시간, 표현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은 물론, 갇혀있는 삶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카즈 히로와 번스타인은 닮은 듯합니다. 영화는 천재 지휘자로 화려한 삶을 살지만 속으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갈등하는 번스타인과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아내 펠리시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거목(巨木)의 무늬 같은 번스타인의 주름을 눈여겨보시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실제 번스타인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공연 영상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1973년 영국 엘리 대성당에서 열린 이 장엄한 공연을 재현하기 위해 브래들리 쿠퍼는 6년에 걸쳐 영상을 돌려 보며 지휘를 익혔다고 하는데요. 넷플릭스에서 20일에 공개되지만, 6일부터 극장 개봉하니 영화관에서 보신다면 더 풍부한 음향으로 영화를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또 다른 영화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영화 어때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6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400만 ‘삼전·하닉’ 개미들 ‘고점 공포’...증권가에선 “삼성전자 30만원·하이닉스 135만원 가
- 네이처 인덱스서 뒷걸음 친 韓 대학, 中은 ‘하버드’ 빼고 10위권 싹쓸이
- 정부, 반도체 호황에 세수 늘자 ‘추경’ 속도전 ..전문가들 “급할수록 ‘핀셋’ 추경해야”
- 이번 달까지 갈까 …美 유인 달 탐사 ‘아르테미스 2호’, 4월 1일 재발사 시도
- ‘성폭행 무혐의’ 김건모, 복귀 후 밝아진 근황 “피부과 다닌다”
- ‘1000분의 9초’ 역전쇼...김길리, 날 들이밀기로 세계선수권 1000m 金
- 이정현 이틀 만에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직 복귀
- “주당 8000원?”… 420만 삼성전자 주주, 연말 배당 잭팟 터질까
- 트럼프·金총리 20분 면담 주선… 한국에 관심 많은 美대통령의 ‘영적 멘토’
- 호르무즈 해협, 군함 들어가면 ‘격멸 구역’…美도 아직 투입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