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블프’ 새벽 오픈런 해보니… “쇼핑보다 관광, SNS 체험차 줄섰다”[글로벌 현장을 가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입력 2023. 11. 2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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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 시간) 오전 5시 50분경 미국 뉴욕 맨해튼 메이시스 백화점의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행사에서 물건을 사려는 소비자들이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김현수 뉴욕 특파원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 다음 날인 24일(현지 시간) 오전 5시 30분.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뉴욕 맨해튼 메이시스 백화점 앞에 긴 줄이 만들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처럼 수백 명이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개점 시간인 오전 6시가 가까워지자 100여 명이 모였다.

이날은 연례 최대 쇼핑 행사로 꼽히는 ‘블랙 프라이데이(블프)’였다. 블랙 프라이데이 당일 주요 백화점의 개점을 기다리는 인파의 행렬은 이른바 ‘오픈런’의 원조로도 불린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할인 TV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짓밟고 싸우는 장면이 미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올해는 어떨까 궁금해 새벽부터 메이시스 백화점의 오픈런 현장을 찾았다. 이 백화점은 블랙 프라이데이 당일에만 오전 6시부터 일찌감치 문을 연다.》

美 취재진 “뉴요커 없나요?”

어머니와 함께 왔다는 아르헨티나인 루치아 메다인 씨는 경제난 때문에 먼 미국에서 물건을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슬프게도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매우 나쁘다.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옷, 특히 가죽 제품은 미국보다 훨씬 비싸다”며 “재킷, 바지 같은 옷을 중점적으로 쇼핑하겠다”고 했다. 매월 140%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소비자물가 상승률 탓에 19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중앙은행 폐지, 미 달러화 도입 등 극단적인 경제 공약을 내세우는 극우 성향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가 당선됐음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인근의 알렉스와 아리아나 씨 커플은 독일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반짝이 스커트로 멋을 낸 한 여성은 프랑스, 수다를 떨던 대가족은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캐리어를 끌고 줄을 선 일행 또한 북부 미시간주에서 쇼핑을 겸해 뉴욕에 놀러 왔다고 말했다. 즉 새벽 줄을 선 소비자들은 토박이 뉴요커가 아니라 ‘관광객’이었다.

소비자 인터뷰를 통해 ‘블프 현장 경기’를 점검하려던 미 취재진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한 방송국 기자는 “(뉴욕) 지역 출신 없나요?”라며 줄을 선 소비자들을 향해 외쳤다. 또 다른 기자는 “많은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으로 돌아선 영향 탓에 블프 분위기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메이시스 오픈런 줄이 훨씬 길이 길었다”고 했다.

24일(현지 시간) 오전 6시경 미국 뉴욕 맨해튼 메이시스 백화점 문이 열리자 새벽부터 대기하던 소비자들이 사진을 찍으며 입장하고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오전 6시가 되자 문이 열렸다. 다른 쇼핑객들에게 떠밀려 들어가 봤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백화점 안에선 점원들이 도열해 ‘환영한다’며 박수를 쳤다. 이들의 열렬한 환영에 오전 4시에 일어난 보람을 느꼈다. 다른 소비자들도 환하게 웃으며 일제히 휴대전화를 들어 블프 오픈 현장을 찍었다. 블프 오픈런이 쇼핑 전쟁보다 관광, 소셜미디어용 체험 성격이 짙어진 셈이다.

물론 눈으로 보고 물건을 사려고 온 뉴욕 소비자도 있었다. 하이힐 롱부츠 매장으로 직행한 세라 씨는 기자에게 “블프 새벽 쇼핑은 나에겐 추수감사절 전통”이라며 “연말 분위기도 느끼고, 직접 신어보고 사고 싶었다”고 했다.

“카드 긁자” 소비 열풍 여전

미 역사학계는 ‘블프’ 용어가 1960년대 필라델피아에서 유래됐다고 본다. 당시 미 육군과 해군의 미식축구 경기가 추수감사절(11월 넷째 주 목요일) 이틀 후인 토요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그 사이에 낀 금요일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자 명절에 연일 고된 근무를 해야 하는 필라델피아 경찰들이 금요일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때 현지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이 도시에 몰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인 행사를 벌인 것이 블프의 유래가 됐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블프 전날 밤 12시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열성 쇼핑객이 넘쳐났다. 뉴욕포스트는 “80% 할인 TV를 차지하기 위해 어르신도 때렸다는 부모님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우리 세대에선 찾을 수 없다”고 전했다.

제프리 제넷 메이시스 최고경영자(CEO)는 “블프 당일보다 그 전 할인 경쟁이 중요해졌기 때문”라고 했다. 유통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블프 당일 할인 행사가 앞당겨졌다. 오픈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에만 있던 ‘할인 유인책’도 사라지는 추세다. 온라인 쇼핑이 보편화되면서 미국의 블프 행사가 유럽과 한국, 일본에까지 확산되며 전 세계 ‘직구족’을 둔 글로벌 유통업체 간 할인 경쟁도 불이 붙는 분위기다.

오픈런 열기는 식었지만 블프 당일 오후가 되자 메이시스, 타깃(마트), 베스트바이(전자기기 전문점), 알로요가(요가복) 등 대형 매장마다 사람들이 들어찼다. 뉴욕 지하철에서도 진풍경이 펼쳐졌다. 친구와 TV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이들, 양손에 쇼핑백을 든 젊은층, 주방용품을 짊어진 주부도 보였다.

온라인 쇼핑 광풍은 특히 거셌다. 이메일함을 열어보기 겁날 정도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할인 행사 소식 폭탄이 쏟아졌다. 추수감사절 다음 월요일로 온라인 쇼핑 집중 할인 행사일을 뜻하는 ‘사이버 먼데이’에 이르자 할인 폭이 더 커졌다. 전자제품, 가정용품뿐 아니라 항공사 마일리지, 스포츠 학원까지 반값 할인으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권위지도 기자들이 뽑은 상품 목록을 보낸다.

미 온라인 소매업 매출 자료 업체 ‘어도비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추수감사절 당일인 23일부터 사이버 먼데이인 27일까지 5일간 미 온라인 매출액은 사상 최고 수준인 총 380억 달러(약 49조2000억 원)였다. 전망치(372억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내년 경기 전망은 엇갈려

블프는 미 국내총생산(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 경기의 바로미터라 다음 해 경기 전망 또한 가늠해볼 수 있다. 일단은 지난해부터 계속된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여파로 올 연말부터 소비가 둔화될 것이라던 유통업계 일각의 경고와 달리 소비 열풍이 재차 확인됨에 따라 내년에도 미국이 경기 침체를 피할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미소매협회(NRF) 설문조사에 따르면 23∼27일 미 소비자 2억40만 명이 쇼핑에 나섰다. 지난해(1억9670만 명)를 넘어선 역대 최대 규모다. 마이클 개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수석 이코노미스트 또한 27일 기자간담회에서 “강력한 고용에 힘입어 예상보다 미 소비는 더 빠르게 늘고 더 오랫동안 (소비 열풍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BoA는 내년 미 경기가 연착륙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소비 패턴을 통해 경기 둔화 조짐이 엿보인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쇼핑객은 늘었지만 1인당 평균 지출액은 321.41달러로 지난해의 325.44달러보다 소폭 줄었다. 또 후불결제(BNPL·Buy Now Pay Later) 서비스 이용액이 한 해 전보다 40% 이상 늘어나는 등 소비자들이 실제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지출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시미언 시걸 BOM 파이낸셜그룹 유통 애널리스트는 ABC뉴스에 “사람들의 지출액을 볼 수는 있지만 실제 그들이 은행 계좌에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진단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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