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

한겨레 입력 2023. 11. 29. 18:45 수정 2023. 11. 2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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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회원들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마포구 광흥창역 일대에서 성평등 예산 삭감 반대 손팻말을 들고 국회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2024년도 정부 예산안은 당신의 내일을 어떻게 바꿀까. 그 답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대한민국이라는 ‘피라미드’의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부가 교조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긴축재정 기조가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긴축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에게는 감세와 세액공제 혜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조조정과 실직의 앞날이 놓여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금 절박한 마음으로 온 사방에 호소하는 중이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 증가율은 2.8%로 역사상 최저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물가상승률보다도 낮다. 어떻게 이런 수치가 가능했을까? 정부는 불필요한 지출을 구조조정해 재정건전성을 확보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재정건전화에 동참하라”는 압력 속에 어떤 예산이 가장 먼저 삭감되고 누가 직격탄을 맞을까. 노인, 장애인, 빈곤 계층, 실직자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은 이미 여러 자리를 통해 논의된 바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또다른 버려진 이들을 알리고자 한다. 바로 성폭력 피해자들이다.

여성가족부는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성매매 피해자 구조지원, 공공기관 폭력예방 교육 예산을 큰 폭으로 삭감했다. 애초에 넉넉하지도 않았던 예산이다.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성인권 교육, 성범죄자 재범 방지 교육, 가정폭력 가해자 교정치료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여가부는 “가해자 교정치료는 원칙적으로 본인 부담”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놨다. 의무교육도 받지 않으려는 판에 자비를 들여 교정치료를 받겠다고 나서는 가해자들이 얼마나 될까? 현장에서는 지금껏 쌓아온 것들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예산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피해자의 회복도, 가해자의 반성도,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도, 지금보다 더 멀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가정폭력상담소 운영 예산 역시 큰 폭으로 삭감됐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상담소는 내년부터 한두명씩 감원하거나 ‘통합’상담소로 전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전 예고도 협의도 없는 일방적 지침이었다. 역시나 여가부는 정부의 재정건전성 기조를 따라 사업을 효율화했다고 한다. 통합상담소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며 어떻게 업무를 이어갈 것인지 현장 분석도 연구도 없었다. 사려 깊은 전문성으로 운영되어야 할 피해자 상담이 해가 바뀌면 자동으로 ‘통폐합’되나? 감원, 구조조정, 인수인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나?

윤석열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5대 폭력’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거창한 계획을 내세웠다. 바로 ‘통합솔루션지원단’으로 권력형 성범죄, 디지털성범죄,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범죄까지 5대 폭력 피해자를 “맞춤형으로, 신속히, 원스톱” 지원하겠다는 시범사업이다.(보도자료에 나오는 표현이다.) 성폭력 피해자 맞춤 서비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시범사업의 공과를 분석하지도 않고 일단 예산안으로 밀어붙이면 전국의 상담소는 그대로 ‘통합’되어야 할까. 대통령의 효율화 및 통폐합 지침을 아무 고민 없이 따르는 여가부를 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소위 긴축재정이 여성과 피해자를 겨냥하는 것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손쉽게 예산안에서 삭제됐던 집단이며,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문제의식도 없을 뿐 아니라 누구도 애써 나서서 이를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긴축재정이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예산 삭감(cut)으로 이어지는 것에 맞서 싸워온 영국의 사회단체 ‘시스터스 언컷’(Sisters Uncut)은 이런 슬로건을 외친다. “긴축재정은 여성을 향한 국가폭력이다!”

역사적으로 긴축재정은 그것이 표방하는 목표를 달성한 바 없다. 국가채무 감소도 경기부양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학자들이 긴축재정을 단순한 정책 실패를 넘어 속임수, 정치적 비합리, 심지어 광기의 한 양태라고까지 부른 이유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는데 반복해서 긴축을 외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에 따르면, 이는 이유 있는 광기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고 기득권 중심의 부와 위계를 지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이 바로 긴축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긴축재정이 국가폭력이라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재정건전성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속에 가장 먼저 지워지는 삶들을 본다. 국회는 과연 이런 예산안을 막아낼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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