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필과 음반 낸 진은숙 "상상 힘들어 바라지도 못했던 일"
"베를린필 첫 내한 때 계단서 관람…내가 죽은 뒤에도 작품 계속 연주되길"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수년간 준비해서 이제야 음반 실물을 손에 쥐었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과 음반을 낸 현대음악 작곡가 진은숙(62)은 지난 28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최근 진은숙의 주요 작품을 녹음한 음반 '베를린필 진은숙 에디션'을 발매했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7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총 6곡이 담겨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생존해있는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음반을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앞서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존 애덤스의 음반을 낸 적은 있지만, 존 애덤스는 2016/2017년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였다. '존 애덤스 에디션'은 상주 기간에 작곡된 작품들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은숙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있는 작곡가의 전집을 내는 경우는 존 애덤스 이후 이번이 두 번째일 것"이라며 "저에게도 의미가 깊고,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음반이 하루아침에 나온 건 아니다"라며 "오랫동안 같이 협업했고, 2015년쯤 음반을 내기로 한 뒤 준비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진은숙은 현재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 및 음악 축제·단체들로부터 작품 위촉이 쇄도하는 인기 작곡가지만, 그에게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하늘의 별' 같은 존재일 때가 있었다.
그는 전설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했던 해인 1984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학교 4학년 때였다고 했다.
"당시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티켓을 사서 공연에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했죠. 단원 가운데 통성명을 한 사람이 한명 있어서 그 사람을 따라 무대 뒤로 들어갔어요. 그날 2층 계단에 앉아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를 들었죠. 이때는 이 악단이 제 곡을 연주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진은숙은 다음 해 독일 함부르크음대 유학길에 올랐고,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고(故) 죄르지 리게티를 사사했다. 2004년에는 '작곡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2005년부터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꾸준히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여러 번 공연했는데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현대음악을, 그것도 내 곡을 연주한다는 걸 오랫동안 믿지 못했다"며 "그러니 음반을 내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어서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음반에는 진은숙에게 그라베마이어상을 안겨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작곡 연도 2001)을 비롯해, 정명훈 지휘의 '첼로 협주곡'(2006∼2008), 사이먼 래틀 지휘의 성악곡 '사이렌의 침묵'(2014), 베를린 필하모닉의 위촉곡 '코로스 코르돈'(2017),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1996∼1997), 산스크리트어로 '빛의 방'이라는 뜻의 관현악곡 '로카나'(2008)이 담겨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공연장인 '베를린 필하모니'가 코로나19로 7개월간 폐쇄됐다가 재개관한 날인 2021년 6월 5일의 연주다. 지휘는 핀란드 출신 사카리 오라모가 맡았다.
진은숙은 "이 작품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였다"며 "단원들도 곡이 어렵다고 힘들어했는데 최선을 다해 연주를 해줬고, 지휘자도 독주자도 훌륭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음반 설명을 통해 "진은숙은 무한한 창의성과 다채로운 사운드로 매혹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는 한국의 작곡가"라며 "이번 에디션은 우리를 흥미로운 발견을 향한 여행으로 초대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진은숙의 음악은 마법 같다"며 "새로운 관점이 끝없이 열리고, 혁신적인 사운드와 복잡한 구조의 미로가 펼쳐지다가 다시 기묘한 아름다움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덧붙였다.
사실 현대음악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아름답게 들리는 선율보다 소리 자체를 새로운 시도들로 들려주는 데 집중해 기이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연주될 기회도 많지는 않다
진은숙은 "현대음악이나 옛날 음악이나 다 같은 음악"이라며 "우리가 지금 아름답게 생각하는 음악을 당시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베토벤의 음악도 당시에는 불협화음이라고 느꼈을 것"이라며 "음악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좋은 음악들은 살아남고, 인간의 귀가 거기에 적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요즘은 전통 레퍼토리를 주로 연주하는 악단들도 현대음악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음악의 역사를 이끄는 건 창작하는 사람들, 즉 작곡가들이에요. 작품은 작곡가가 죽은 뒤에야 정상적으로 평가되죠. 제가 후대에 어떻게 평가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바람이 있다면 제가 없을 때도 제 작품이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계속 연주됐으면 하는 거죠.(웃음)"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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