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일 분투 결과는 29개국 지지... 한국 외교, 무엇을 얻고 잃었나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해 죄송하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한덕수 국무총리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의 염원이 참담한 결과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지난 17개월 동안 민관이 함께 182개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 전체와 접촉해 총력 설득에 나섰는데도 돌아온 건 경쟁국 사우디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29개국 지지였다. 물론 사우디의 막강한 '오일 머니' 공세를 넘어서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일 수는 있다. 하지만 미국 등 강대국에 의존한 한국 외교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초라한 성적표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부산 유치를 위해 509일간 지구 495바퀴 강행군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5월 출범 직후부터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7월 기존의 민간 재단법인 형태였던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를 국무총리 직속 기관으로 격상·발족했다. 한덕수 총리가 정부 측 공동위원장을,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민간 측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유치위에는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12명의 유관 부처 장관이 포함됐고, 국가정보원장까지 이름을 올렸다. 민관이 쌍끌이로 나서 전면전을 벌인 셈이다.
정부 인사들이 최근까지 엑스포 유치를 위해 이동한 거리는 976만8,194㎞에 달했다. 지구를 243바퀴 돌만큼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석열 대통령은 96개국 462명의 고위급(정상 11명 포함) 인사를 만나 '부산 엑스포 유치'를 설득했다. 한 총리도 112개국 203명(정상 74명 포함)의 인사를 만났다. 직접 방문한 곳만 해도 윤 대통령은 12개국, 한 총리는 25개국에 달했다.
외교부의 탄탄한 뒷받침도 있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29일 "해외 네트워킹을 이용해 사실상 182개 회원국 전체를 만났다"고 했다. 이 중엔 해외공관이 있는 나라도 있었지만, 공관이 없는 나라도 부지기수였다. 정부 관계자는 "일정부터 기본적인 교섭 전략까지 대부분이 외교부의 업무였다"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각국 공관으로부터 현지 동향을 수시로 보고 받았으며, 총회 직전엔 하루 100통 이상의 전화가 서울로 빗발쳤다고 한다.
유럽 아프리카에 주력..."직접 만나고 설명하고"
정부가 주력 공략 대상으로 삼은 곳은 대륙별 표가 많은 유럽(49개국)과 아프리카(49개국)였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직접 '유럽-아프리카' 공관장들과 화상회의를 열고, 엑스포 유치 전략을 꼼꼼히 챙겼다. 한 총리는 지난달 프랑스 등 유럽 4개국을 순방한 데 이어 이달 초 프랑스 파리를 방문, 파리 상주 BIE 회원국 대표를 만나 지지를 당부했다. 특히 최종 투표 때까지 파리를 지키며 지지를 호소했다.
윤 대통령은 총회가 임박한 지난 23, 24일 파리를 찾아 오·만찬과 리셉션 등 3개의 공식 행사를 열고 파리 주재 BIE 대표단을 만나 유치전을 펼쳤다. 윤 대통령이 파리 체류 기간 만난 사람만 1,000명이 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저인망' 유치전이 펼쳐졌다. 수억 달러 규모의 차관 제공 등을 앞세운 사우디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만나고, 들어보고, 제안하는'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역사를 설명하고, 부산이 가진 도시의 매력을 직접 보여주고 설명해야 했다"고 했다. 외교부 등 각 부처 국장급 외교관들이 올여름 휴가 기간을 쪼개 직접 아프리카 국가들을 찾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개최지 선정 최종 투표 직전에는 한국이 BIE 회원국 대표단에 좋은 제안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 경쟁국인 사우디가 더 좋은 카드를 제시하는 등 치열한 막판 수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아쉬운 패배..."나름 성과 있었지만, 외교 실패 돌아봐야"
하지만 이 같은 노력도 결국은 BIE 회원국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 당초 1차 투표에서 이탈리아 로마를 제친 뒤 리야드와 최종 승부를 보겠다는 시나리오는, 1차 29표라는 결과로 무력해졌다. 3개국 이상 경쟁에서 1차 투표만으로 승자가 가려진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고, 우리에겐 한편으로 굴욕이었다.
참패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결과는 아쉬웠지만, 최선을 다한 건 맞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해외 네트워킹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었다"고 긍정 평가했다. 개최지 결정 분위기상 예상외의 접전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분전했다"는 평가도 일부 나온다. 한 총리 역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유치 교섭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자산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실패의 여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대한민국 외교력을 쏟아부었지만 '29개국 지지'에 그쳤기 때문이다. 전직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을 위주로 한 한국 외교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됐다"며 "이번 실패를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 외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중앙부처의 한 고위 간부는 "예상됐던 사우디의 물량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건 결국 전략의 실패였고, 결과를 끝내 뒤집지 못했다는 점은 한국 외교가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에 크게 할 말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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