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로 나눈 소통의 장,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축제
“세상의 어려움이 걸림돌일까? 난 디딤돌이라고 생각해!”
“시간을 죽이고 있다고? 난 죽이는 시간을 세고 있어~”
무대 위에서 한 여성이 외쳤다. 뒤이어 다른 여성도 말했다. 관객들은 그들의 대사와 몸짓마다 열렬히 환호했다. 11월 23일 서울생활문화센터에서는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 ‘새 어른의 연극-더 늦기 전에’ 발표회가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11월 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한 달 동안 열리는 이번 행사는 전국 곳곳에서 180여 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특히 올해는 전국에서 함께 진행돼 더 의미가 깊다.
올 한 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을까. 담당자에 의하면 전국 1만2000여 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들이 270만 명의 참여자와 함께했다고 한다. 놀라웠다.
이 프로그램 중에는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이 있었다. 그중에서 ‘새 어른(YOLD) 세대 참여자 중심 연극 프로그램’이 시선을 끌었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에서 노년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이에게 나이가 숫자라는 개념은 희미해졌다. 새 어른을 뜻하는 YOLD(욜드)는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65~75세까지의 노년층으로 전통적인 관념과 달리 자신의 삶을 즐기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란다.
“예전에 생각하던 노년 생활이 아니잖아요. 이전 세대와 다른 관점으로 보고 그에 맞는 신규 문화예술교육 지원이 필요하겠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담당자가 말했다.
올 하반기 15회의 연극을 진행하는 동안 참여자들은 서로 많은 걸 나누고 공유했다. 공연장 밖에는 그간의 기록들이 전시돼 있었다. 전시라기보다는 추억에 가깝다. 벽에 붙은 종이에선 고민한 흔적과 느낌이 가득했다. 어느 날은 시를 썼고 다른 날은 다양한 재료로 담아둔 기억을 표현했다. 그들의 기록을 보는 동안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꽃을 들고 온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벽에 붙은 기록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그러는 사이 한 시간이 훌쩍 지나 공연장 문이 열렸다.
9명의 출연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여러 짧은 단막극이 펼쳐졌다. 때로는 1인이, 혹은 모두가 극을 이어나갔다.
‘설거지 마친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외치는 출연자 뒤로 고무장갑을 끼고 모두가 댄스를 췄다. 공무원이었다는 출연자는 오래된 주전자를 들고 주전자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또 다른 출연자는 소년 잡지를 사주던 아버지를 떠올리다가 울컥했다.
단순한 발표회와는 달랐다. 내용은 모두 이들의 옛 기억이었다. 주변에서 있는 일이라 더 공감이 가서 그럴까. 객석에서는 웃고 훌쩍거리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연극이 아닌 일기장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 연극을 해봤어요. 원래 수줍어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잘 못 하거든요. 대본 외우는 연극이었다면 못 했을 거 같아요. 좋은 기회가 찾아와 개인적으로 감격스럽네요.”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저는 무대에 선 경험이 좀 있어요. 그때마다 긴 대본을 외워야 했는데요. 못 외우면 감독님께 혼나고 배우에게도 미안해 부담스럽잖아요. 그런데 여기선 4회차까지 대본을 안 주시는 거예요.”
“전 배우는 어려울 거 같지만, 참여하고 싶어 스태프를 하겠다고 했는데요. 막상 무대에 오르니까 또 하게 되더라고요. 그 기억이 정말 뜨겁고 행복하게 남았네요.”
각자 무대에서 소감을 말하는 새 어른들의 표정은 소년, 소녀처럼 상기돼 있었다.
무대 뒤 이야기
“자기 이야기니까 외울 필요가 없잖아요. 대사를 잊어버린다고 해도 내 이야기니까 다시 생생하게 나오거든요.”
좀 더 듣고 싶었다. 사실 무대 뒤가 더 재밌기 마련이니까. 연극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이를 기획한 교수와 배우들을 만났다. 대사가 많아 어렵지 않았냐는 말에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프로그램에 관해서도 궁금했다.
“전 함께 했던 시간이 진짜 좋았어요. 자기 이야기가 바로 나오지 않아도 어떤 물체나 시로 표현하면서 떠올랐거든요. 나를 되돌아보게도 됐고요.”
“다들 많이 친해졌어요. 서로 먹을 걸 들고 오셔서 나누느라 바빴죠.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참 따뜻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점이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해요. 진솔한 자기 이야기니까 좀 못 하면 또 어때요. 이렇게 부담없이 한다면 전 100살까지도 하겠어요.”
새 어른의 강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오랫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잖아요. 경험의 폭이 넓으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좀 더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서로 너그럽게 응원해 줄 수 있는 게 장점 같아요.”
“이젠 젊은 세대에게 좀 져주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넘치는 활력이 궁금했다. 9명의 새 어른들은 인천에서 왔다. 9월부터 토요일마다 4시간씩 15회 동안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서울까지 와서 공연을 막 끝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뜨거운 게 많아요. 그걸 꺼낸 거죠. 저는 노래로 하고 또 이 친구는 여행으로 하고.” 그들은 흥겹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누군가는 음원을 계속 내며 시를 쓰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병을 앓고 세계여행을 다녀와 여행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좀 더 이런 연극을 계속하고 싶어요. 아니, 이런 프로그램이 많았으면 해요. 이렇게 가공하지 않은 날것 같은 이야기를 하며 저희도 뭉클했지만, 젊은 관객도 공감하고 눈물을 흘렸잖아요. 새 어른을 위한 연극이지만, 연령을 떠나 보는 관객이나, 하는 저희나 무척 건강해질 거 같아요.”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병주 교수(서울교대 대학원)는 “뭉클하고 짜릿했던 순간들을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맥락이 없는 만큼 잘 전해질까도 싶었고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새 어른을 보는 자신의 생각도 들려줬다.
“제가 50대거든요. 사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형, 누나 뻘이죠. 어르신들도 다 조금씩 문화가 다르잖아요. 분절하자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런 분들을 위한 문화가 없을까 생각하다 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다고 어렵게 제안 드렸는데 흔쾌하게 받아주셨죠.”
연극에 몰입했다는 30대 한 관객은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구나 싶어 든든해요. 뭔가 즐거운 일이 기다리는 듯해요. 그러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소감을 들려줬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그날, 밖에는 날아갈 듯 강풍이 불었다. 그에 지지 않았다. 공연장에선 뜨거운 열풍이 모두의 마음을 녹였다. 언젠가 그 무대엔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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