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소망의 섬, 배반의 강, 불멸의 빛”
그대 슬픈 눈에 어리는 이슬처럼 맑은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 들어와 푸른 샘으로 솟아나리니
그대 여린 입술 사이로 바람처럼 스친 미소가
나의 넋을 휘감아도는 불꽃이 되어 타오르리니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빈 바다를 헤매는 내게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되어
사랑이란 소망의 섬, 그 기슭에 다가갈 수 있다면
사랑이란 약속의 땅, 그곳에 깃들 수만 있다면
그대 붉은 입술 다가와 화살처럼 스친 입맞춤
나의 넋을 앗아가버린 상처되어 남아있는데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떠나버린 나의 사랑아
꽃상여에 그대 보내며 살아야 할 이유마저 없으니
사랑이란 절망의 벽, 울부짖는 통곡마저 갇힌 채
사랑이란 배반의 강, 간절한 언약마저 버리고
사랑이여 불멸의 빛, 거짓 없는 순종으로 그대를
사랑이여 사랑이여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1992년 조용필 14집, 작사 곽태요, 작곡·노래 조용필)
조용필 노래 제목에 서양 여성의 이름이 들어간 건 두 곡이다. 조용필 10집(1988년)에 ‘모나리자’가, 14집(1992년)에 ‘슬픈 베아트리체’가 있다.
두 노래 모두 잡을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그 마음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미소가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돌아서야 하는 걸까/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나”
‘단발머리’를 쓴 조용필의 오랜 작사 파트너 박건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멸의 작품 ‘모나리자’의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보고 썼다고 한다. 조용필 콘서트의 마지막 곡으로 불리는 노래다.
이 노래 4년 후 ‘슬픈 베아트리체’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제목에 생경한 느낌을 가졌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서양에는 사모하는 여인을 칭하는 이름들이 있다. ‘줄리엣’, ‘베아트리체’, ‘비너스’, ‘아프로디테’, ‘마돈나’ 등이 그렇다. 문학작품이나 신화 속에 나오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다. ‘베아트리체’는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단테의 평생 마음 속 연인이었다.
이런 이름들은 대체로 현실에서 맺어질 수 없는 연인이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입된다.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형이거나 짝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가까이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슬픈 베아트리체’는 그걸 묻는다.
조용필의 노랫말들은 대부분 상당히 시적이다. 한양대 국문과 유성호 교수는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이란 책까지 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음유시인 밥 딜런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슬픈 베아트리체’는 특히 그렇다. 산문으로 풀면 이렇다.
“당신은 이슬처럼 맑은 영혼이고 바람처럼 스친 미소입니다. 그것들이 내 가슴에 스며들어와 솟아나는 푸른 샘이, 넋을 휘감아 도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내게 사랑은 소망의 섬이요, 약속한 땅입니다. 그 기슭에 다가서고 그 땅에 깃들고 싶습니다. 빈 바다를 헤매는 내가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당신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떠났지요. 화살처럼 스친 당신의 붉은 입술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당신을 꽃상여에 보내며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했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절망의 벽이요, 배반의 강이었나 봅니다. 울부짖는 통곡마저 가두고 간절한 언약마저 저버린 나의 사랑. 그래도 내게 사랑은 불멸의 빛입니다. 거짓 없는 순종으로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1274년, 아홉 살의 알리기에리 단테(1265~1321)는 이탈리아 피렌체 최고 가문의 딸인 여덟 살의 베아트리체를 그 집 파티에서 처음 만나 혼자만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피렌체 아르노강의 베키오 다리에서 우연히 다시 스쳤으나 아무런 고백도 하지 못한 채 인사만 건네고 헤어진다. 그렇게 짧은 단 두 번의 마주침이었지만 베아트리체는 평생 단체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연인이 되었다.
명문가의 남자와 결혼을 한 베아트리체는 24세 젊은 나이로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단테도 결혼을 하고 세 아들을 두었다.
단테는 피렌체 정계의 핵심 인물로 출세했으나 실각했다. 긴 망명 생활을 하면서 그가 한 일은 못다 이룬 첫사랑을 문학으로 승화한 것이다. 불멸의 작품인 ‘신곡’(神曲, La Commedia di Dante Alighie)이다. 죽기 1년 전인 1320년 12년 만에 완성한 대서사시다.
베아트리체는 ‘신곡’에서 숭고한 사랑의 상징으로 환생하고 천국의 안내자가 되어 단테를 구원한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최고의 선이요, 영원한 동경과 사랑이자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평생을 함께한 셈이다.
‘신곡’ 이후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연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짝사랑하던 여인의 이름도 베아트리체다.
‘신곡’의 원제는 우리말로 하면 ‘단테의 희극’인데, 일본 작가 모리 오가이가 만든 이상한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단테에 대해 ‘지구 위를 걸었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극찬했고, 괴테는 ‘신곡’에 대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찬미했다.
시인 서정주는 이 노랫말이 한 편의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말했다. 이 노래 작사가는 곽태요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언론사에서 일하며 시를 썼다고 하는데, 같은 앨범에 실린 ‘고독한 러너’ 외에는 다른 가사가 찾아지지 않는다.
노래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반주로 고급한 가곡의 느낌을 준다. 대부분 노래의 길이가 3분 안팎인 시절, 이 노래는 5분 22초나 이어지며 반복되는 후렴도 없다. 조용필은 가성과 진성을 넘나드는 창법을 구사했다. 고난도의 노래로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부를 거는 노래로 많이 불린다. ‘팬텀싱어’에서는 성악으로 재조명됐다.
조용필은 ‘고독’과 ‘바람’의 가수다. 그의 노래들은 인생과 사랑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근원적 고독과 허무를 깔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조용필은 고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악수하며 극복하는 삶의 의지로 승화한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고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이라면서도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이고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킬리만자로의 표범’).
‘슬픈 베아트리체’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통곡하면서도 사랑은 ‘불멸의 빛’이라며 그 사랑에 거짓 없이 순종하겠노라고 한다.
역시 곽태요가 작사한 ‘고독한 러너’에서는 어떤가. “어느 하늘에 꿈이 있을까/어느 바다에 사랑 있을까/이제는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라고 고독을 말하지만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리라/푸른 바다에 파도가 되어/아침 햇살에 솟아오르고/저녁 노을에 지는 날까지/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뛰어가리”라며 고독한 러너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조용필 음악의 원천은 깊은 고독이지만 그는 고독에서 늘 새로 탄생한다. 그의 밴드명처럼 ‘위대한 탄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빠졌든, 그 사랑으로 아파하든, 사랑이 떠나갔든, 그의 노래에서 위안과 삶의 의지를 얻는 것이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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