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맥락은 어디에?…대가의 명작 공허한 나열
김범(1963~)과 박모(1957~2004).
외자 이름을 가진 두 작가는 혁명아였다. 26년 전 그들의 눈과 손에 의해 한국 미술판에 소리 없는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진앙지는 1997년 9~11월 ‘지구의 여백’이란 주제 아래 다섯 개 섹션으로 나뉘어 열린 2회 광주비엔날레였다. 패기 발랄한 30대 큐레이터였던 이영철 전시기획실장이 회심의 카드로 전격 출품시킨 두 무명작가의 작품은 이후 센세이셔널한 열풍을 일으킨다. 당시 모더니즘 진영과 민중미술 진영으로 갈라져 여전히 대립하던 한국 미술판은 명확한 조형성과 메시지를 중시했다. 선과 색채 등의 형식이 뚜렷하거나 강렬해야 했고 내용도 명쾌한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일종의 자기 구속에 빠져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현지 대안공간 등에서 개념미술에 영향을 받았던 두 사람은 달랐다.
박모(본명은 박철호이며 97년 이후 박이소로 개명)는 종이나 진흙, 비닐 등의 재료로 ‘유엔’성냥갑 상표의 유엔탑과 텍스트가 들어간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압축성장한 한국사회의 허실을 냉소적으로 표상했다. 김범은 작지만, 모호한 모양새에 상식을 깨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작품들을 냈다. 망치 자루의 배를 부르게 빚어놓은 ‘임신한 망치’와 가짜 수염을 캔버스 위에 걸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성경 구절의 영어 문장 텍스트를 화폭 위에 옮겨 적은 ‘잃어버린 양’, 그리고 20여년 뒤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게 될 ‘변신술’이란 소책자 1점을 출품했다. ‘변신술’은 책자를 읽는 사람이 바위나 냉장고가 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스스로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은 개념적인 책자였다. 청년미술인들은 열광했다. 미술이 형식의 굴레를 벗어나 상상과 생각만으로도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욱 큰 파고는 이듬해 서울 옛 서울고 자리(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터)에 임시로 지은 서울시립미술관 가건물에서 열린 ‘98도시와 영상-의식주’ 전에서 일어났다. 박모는 의식주를 모티브로 한 큰 설치작품을 선보였고, 김범은 ‘변신술’에 이어 ‘고향’이란 책자 하나를 덜렁 내놓고 관객에게 우편발송까지 했는데, 이 작품이 일으킨 울림 또한 컸다. “강원도 평창군 운계리라는 마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고향을 잃어버린 도시민들에게 그럴싸한 고향의 대체물로서 가상의 마을 운계리의 지명, 위치, 교통, 주변환경, 경관, 생활, 산업, 풍물, 경제, 주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타인에게 마치 자신의 고향처럼 전할 수 있는 가짜 정보를 제공한 것이지만, 오직 언어만으로 서사적이고 이미지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책의 개념적 매력에 많은 미술인들이 공감했다.
김범은 보는 것 자체의 스펙터클에만 중독된 한국 미술판의 속물성에 작지만 치명적인 구멍을 냈다. 고향과 변신에 대한 책자 말고도 캔버스를 꿰뚫어버리고 개가 광기에 휩싸여 캔버스에 그려진 자기의 몸을 뜯어먹는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미술에서 사유의 중요성을 처음 일깨워주었다. 허접하지만 날카로운 풍자와 시적인 감성으로 일관한 개념적 코드의 미술이 등장했고, 이런 흐름은 청년 작가들 사이에 대세가 되면서 한국 미술의 지형도가 바뀌게 된다. 둘이 물꼬를 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영상과 설치작품, 퍼포먼스로 개념적 메시지를 이야기하는 양혜규, 김소라, 함양아, 함경아 등이 등장했다.
2000년대 이후 두 작가에게 유력한 활동무대를 제공한 곳은 아트선재센터를 꾸린 기획자 김선정이었다. 김범은 2002년 경주 선재미술관과 2010년 아트선재센터 전시를 통해 그의 개념을 더욱 확대시킨 문제작들을 내놓는다. 손짓과 백조의 몸짓이 헷갈리는 조형물과 판대기 하나로 사자 형상을 잘라 세워놓고 뒤쪽에 호스 구조물로 엉터리 내장을 붙인 조형물, 일상용품 등을 걸상에 앉혀놓고 사물이 되는 법을 모니터로 강의하는 사물 봉숭아학당의 풍경이 그때 선보였다.
지금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김범의 회고전 ‘바위가 되는 법’(12월3일까지)에는 지난 20여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뒤바꿨던 작가의 지난날 구작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90년대 만든 여러 명작들부터 아트선재와 국내외 전시장에서 활동했던 2000~2010년대의 작품들이 뒤섞여 나와 있다. 최근 지병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해 사실상 근작이 없다. 리움 쪽은 작가의 역대 전시사상 최대인 70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고 홍보했다.
이채로운 건 이 전시가 광주비엔날레나 도시와 영상전, 아트선재 개인전 등 작품 공개에 얽힌 과거의 역사적 내력에 대해 일언반구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들은 수납장 유물처럼 이름표만 붙인 채 나와있다. 김범이 어떤 경로를 거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대가가 되었는지, 그가 해온 개념적인 미술은 서구의 개념적인 미술이나 김범이 등장하기 20여년 전부터 개념미술을 해온 이승택, 이건용, 성능경 등의 원로 전위 작가의 콘셉트와 어떻게 다른지, 후대 본격적으로 활동한 김소라, 양혜규, 임민욱 등의 대표작가들과는 계보학적으로 어떻게 맥락을 공유하고 다른 갈래를 뻗어 나갔는지 등에 대한 연구성과와 관점은 전시장에 없다.
기획의 방향성이 중요한 현대미술 전시에서 전시 대상인 특정작가의 작품과 활동 내력에 대한 서베이와 연구는 필수적인 요소다. 이런 과정을 거쳐 큐레이터가 바라본 독자적인 잣대의 해석이 전시에 투영되는 것이 기본이다. 이 전시에는 이런 재조명과 해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리움 쪽은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대규모 서베이 전시라고 주장한다.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보도자료의 첫머리는 작가가 13년 전 아트선재 전시를 앞두고 했던 인터뷰 발언으로 시작된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 이 문장은 김성원 부관장이 기획한 이 전시 자체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현재와 미래의 김범에 대해 어떤 얘기도 해주고 있지 않다는 한 기획자의 촌평처럼, 이 전시는 훗날 거장이 되리라 예상되는, 한국미술판의 보석과도 같은 작가를 과거 유물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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