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선수로 성공하길 꿈꿨으나 처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사내가 있다. ‘역전의 명수’로 유명한 전북의 야구 명문 군산상고 시절 투수로 활약한 그는 2003년 프로야구 구단 LG 트윈스에 들어갔지만 보잘 것 없는 ‘신고선수’ 신분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은 것. 이후 얼굴없는 가수 ‘포니’로 변신했지만 긴 무명생활 끝에 포기했다. 야구 10년, 가수 10년 열심히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뮤지컬 배우의 길로 나섰지만 오디션(심사) 문턱을 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2015년, 2년차 무명 뮤지컬 배우로서 마지막 오디션에 도전했다. 2013년 국내 초연에 이어 두 번째 공연인 ‘레미제라블’에서 혁명을 이끄는 청년 ‘앙졸라’ 역이었다. ‘이거 안 되면 미련 없이 떠나자(뮤지컬을 관두자)’고 마음먹었는데 오디션이 끝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체육 교사가 되려 임용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스포츠센터 입사 얘기도 오갈 즈음 몇 달 만에 ‘합격’ 통보가 왔다. 갓 태어난 아들을 위해서도,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직업이 생겼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
그후 8년, 뮤지컬 배우 민우혁(40)은 주인공 ‘장발장’ 역으로 ‘레미제라블’ 무대에 다시 섰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간절하게 노력한 결과다. ‘레미제라블’의 앙졸라 역으로 존재감을 알린 그는 ‘위키드’, ‘아이다’, ‘벤허’, ‘지킬 앤 하이드’, ‘프랑켄슈타인’, ‘광주’ 등 대형 뮤지컬 작품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으며 뮤지컬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얼마 전에는 인기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 주연급으로 출연해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8년 전 자신의 인생을 포기가 아닌 희망으로 바꿔준 ‘레미제라블’ 무대에, 그것도 주인공으로 서는 민우혁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2개월여의 부산 공연을 마치고 30일부터 내년 3월 10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공연되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역을 최재림과 번갈아 맡는다.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전설적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와 연출가 트레버 넌,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가 알랭 부브리가 손잡고 만들었다. 빵 하나를 훔쳤다가 19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장발장의 굴곡진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1985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초연 후 53개국에서 1억3000만명가량이 본 명작이다.
지난 2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난 민우혁은 “장발장은 죽기 전 마지막 역할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라왔던 배역이었다. 이렇게 빨리 맡게 될 줄은 몰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레미제라블’이 다시 공연된다고 하자 장발장을 염두에 두고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어떤 배역이든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장발장으로 낙점된 것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장발장 모습을 보여주려고 자고 일어난 상태 그대로, 옷도 일부러 크게 입고 오디션을 봤어요. 매킨토시도 캐스팅할 때 제가 빵을 훔쳐먹게 생긴 이미지라고 말했다더군요.”(웃음)
그러나 딱 30초만 좋았고, 바로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악과 실용음악 등 보컬 레슨만 4개를 받으며 공연을 준비했다. “장발장은 모든 뮤지컬 배역 중 가장 난도가 높습니다. 남자가 낼 수 있는 모든 음역대를 다 내야 하거든요.“
민우혁은 “장발장의 따뜻함이 19세기의 암울하고 차가운 시대를 따뜻하게 녹여준다”며 ‘레미제라블’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을 보리’라는 마지막 대사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포기할 때마다 굉장히 무서웠지만 그럼에도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믿음 덕이었죠.”
민우혁은 ‘닥터 차정숙’ 출연 후 드라마와 영화 쪽에서도 출연제의가 잇따르고 있지만 ‘레미제라블’ 공연 기간에는 최대한 다른 일정을 잡지 않기로 했다. 그는 “(매체에 출연하면서) 뮤지컬 장르를 (대중에) 알리는 게 행복하다. 팬들이 많아져 책임감도 더 커졌다”며 “드라마와 영화 출연이 늘더라도 뮤지컬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1년에 한 편(이상은) 꼭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우혁에게 뮤지컬이란. “제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뮤지컬에서 맡은 역할들이 저를 인도해준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제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