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정당이 1당 된 네덜란드, 하지만 2당은 녹색좌파-노동당 연합
11월 22일 실시된 네덜란드 총선에서 최대 승자로 부상한 것은 극우 포퓰리스트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자유를 위한 당(PVV, 이하 자유당)'이다. 자유당은 지난 2021년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10.79%)의 2배가 넘는 23.7%를 득표하며 제1당으로 떠올랐다. "네덜란드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다"라는 반이민-반무슬림 구호로 일관한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무려 1/4에 가까운 유권자가 호응한 결과다.
브라질 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보다 더한 극우 선동가 하비에르 밀레이(그의 공약 중에는 장기매매 '자유시장' 허용도 있다)가 당선된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과 더불어 네덜란드 총선은 극우 포퓰리즘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팬데믹 와중에 드러낸 무능과 광기 탓에 한 동안 움츠러들었던 극우 포퓰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재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년 미국 대선에서 제2기 트럼프 정부가 등장하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한데 이런 극우파 바람 말고도 이번 네덜란드 총선에서 이목을 끌만한 또 다른 중대한 흐름이 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노동당(PvdA)과 대표적 녹색 정당인 '녹색좌파(GL)'가 결성한 선거연합정당 '녹색좌파-노동당 연합'(이하 녹색노동연합)이다. 유럽 그린딜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한 노동당 중진 프란스 팀머만스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녹색노동연합은 이번에 15.5%를 얻으며 제2당이 되었다.
서유럽 국가에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이 연합하여 얻은 득표율이 15%라고 하면, "고작 그 정도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사회민주당-녹색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치는 독일에서조차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지지율은 각각 15%쯤은 된다. 이에 비하면 둘이 합쳐 15%라는 결과는 실망스럽게 느껴질 만하다.
그러나 2년 전인 2021년 네덜란드 총선 결과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5.73%, 녹색좌파는 5.1%를 얻어 각각 제6당, 제7당이 되었다. 두 당 득표율은 좀 더 급진적인 입장인 또 다른 좌파정당 사회주의당(SP, 이하 사회당)의 득표율(5.98%)보다도 낮았다. 2년 전의 이 결과와 비교하면, 이번에 녹색노동연합이 거둔 성적은 두 당의 쇠퇴 경향이 반전됐을 뿐만 아니라 좌파 지지층이 다시 결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녹색노동연합이라는 '실험'이 어느 정도는 성과를 냈다고 평할 만한 결과다.
21세기 들어 침체에 빠진 노동당
네덜란드 정치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네덜란드 하원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전국을 몇 개 선거구로 나눠 전면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스웨덴, 덴마크 등과 달리 네덜란드는 전국을 한 선거구로 삼아 전면 비례대표제를 시행한다. 이런 나라는 네덜란드를 빼면 이스라엘 정도 밖에 없다.
총선에서 네덜란드 유권자는 선거구 구별 없이 지지 정당에 한 표를 던지고, 그 정당이 제출한 후보 명부 가운데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더 던질 수 있다. 그러면 각 정당 득표율이 고스란히 총 150석의 하원 의석에 반영된다. 이렇게 각 정당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을 정확하게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의회 진입 장벽도 극히 낮다. 전국 득표율이 0.67%만 넘으면 하원 의석 한 석을 얻는다. 전 세계에서 의회 문턱이 가장 낮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의회는 극단적인 다당 구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의회정부제(의원내각제)를 채택하므로, 원내 여러 정당이 경쟁하거나 대결하기만 하지 않고 서로 협력하고 합의하는 데도 익숙하다. 따라서 한국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을 떠올리며 굳이 네덜란드의 복잡한 다당 구도를 걱정해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당 정치의 원심력이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노동당은 어쩌면 이 원심력의 가장 커다란 희생자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노동당은 해외에서는 주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빔 콕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콕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다른 중도좌파 정치가들(토니 블레어 등등)에 비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들(가령, 동성결혼 합법화나 시간제 노동자 권리 보장)을 남겼다. 하지만 이 시기에 네덜란드 노동당도 분명히, '제3의 길' 노선을 추구하며 유럽 신자유주의 질서의 한 축이 됐다.
그 후과로, 노동당은 콕이 물러난 뒤에 장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그간 노동당도 적극적으로 동의해 온 노동 유연화로 인해 최대 지지 기반인 노동조합이 구심력을 잃어갔다. 반면에 대도시의 젊은 대졸 중간계급부터 여성 시간제 노동자, 무슬림 이주 노동자 등 낯선 잠재적 좌파 지지 집단이 늘어났다. 다당 구도에서 노동당과 경쟁하던 다른 좌파정당들(녹색좌파, 사회당 등)은 노동당보다 더 성공적으로 이런 새로운 유권자층에게 다가갔다.
노동당도 나름 응전을 했다. '제3의 길' 노선에서 벗어나는 새 노선을 재정립하려 하기도 했고, 젊은 지도자를 내세워 참신한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반등 효과는 대개 단기에 그쳤다. 2000년대 이후 노동당은 가까스로 20% 대 지지율을 유지했지만, 한 번도 그 이상으로 지지층을 늘리지 못했다.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정치 지형은 노동당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전통적인 좌우 구도가 흔들리자 시민들의 투표 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연립정부 구성 향배와는 상관없이 우직하게 자기가 지지하는 이념, 정책을 대변하는 정당에 표를 던졌지만, 이제는 누가 차기 총리가 될지를 둘러싸고 전략 투표를 한다. 노동당에 투표해 온 유권자라 하더라도, 노동당 총리 후보가 원내 다수의 지지를 모아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면, 더 매력적인 총리 후보를 내세운 다른 좌파나 중도파 정당에 표를 준다.
그 결과가 바로 2017년 총선 결과였다. 2012년 총선에서 24.8%를 기록했던 노동당 득표율은 이 선거에서 5.7%로 급락했다. 이는 한편으로 노동당이 보수우파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당(VVD, 이하 '자유민주국민당')' 주도 연립정부에 참여한 뒤에 활약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데 대한 심판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당보다 더 유력한 총리 후보를 내세운 듯 보이던 중도파 '민주파66(D66)'에 상당수 노동당 지지층이 전략 투표를 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는 서유럽 국가에서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가장 충격적으로 추락한 사례들 중 하나다. 비슷한 경우로는 아직까지 그리스의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 이하 '파속')'이나 프랑스 사회당이 있을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동당은 4년 뒤인 2021년 총선에서도 5% 대 득표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당과 녹색좌파, 경쟁에서 협력으로
네덜란드 노동당이 쇠락하는 광경은 몇 년 전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의 판박이였다. 2010년대 중반에 그리스에서는 재정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된 파속이 몰락하자 좀 더 급진적인 좌파정당인 '급진좌파연합(SYRIZA, 이하 시리자)'이 그 빈 공간을 채우며 좌파 대표정당으로 급부상한 바 있다. 원내 좌파정당만 꼽아도 늘 5, 6개는 되는 네덜란드에서는 '시리자' 역할을 할 정당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 중에도 주목을 받은 것은 사회당과 녹색좌파였다.
사회당은 작은 마오주의 정파가 지방의회에서부터 착실히 기반을 쌓으며 성장한 정당이다. 반면에 녹색좌파는 현실사회주의권이 한창 흔들리던 1989년에 4개의 좌파정당, 즉 공산당, 평화사회주의당, 급진파정당, 복음인민당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현재는 유럽녹색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녹색 정당이지만, 뿌리는 이렇게 급진좌파, 신좌파에 있으며, 이 점을 '녹색<좌파>'라는 당명에 명시하고 있다. 신기해 할 일은 아니다. 독일 녹색당만 해도 출발점은 급진좌파, 신좌파 내부의 성찰과 노선 전환이었다.
녹색좌파는 노동당이 '제3의 길' 노선을 걷던 시기에 이를 왼쪽에서 비판하며, 총선에서 때로 5% 넘는 득표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까지는 노동당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다 2015년에 무슬림 이주민 2세인 1986년생 예시 클라버가 새 대표로 선출되자 바람이 일었다. 2년 뒤인 2017년 총선에서 녹색좌파는 9.1%를 득표하며 5% 대로 득표율이 곤두박질친 노동당을 제쳤다. 이대로라면 녹색좌파가 '네덜란드판 시리자'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리스가 아니었다. 한때 녹색좌파를 지지한 유권자 중 상당수는 4년 뒤에 녹색좌파보다 더 철저한 생태주의를 내세우는 '동물을 위한 당(PvdD)'으로 이동했다. 그 밖에도 노동당과 녹색좌파 왼쪽에는 숱한 신당이 등장했다. 노동당뿐만 아니라 클라버가 이끄는 녹색좌파도 이런 원심력에 맞서 기존 지지층을 계속 결집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두 당 모두 5% 대에 머문 지난 2021년 총선 성적이다.
녹색노동연합은 바로 이 침체와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아래로부터 "두 당이 협력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한 초당적 평당원 운동이었다. 2021년에 '적색-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 운동에는 노동당 당원과 녹색좌파 당원이 함께 했으며, 당적이 없는 시민사회 세력들도 참여했다. '적색-녹색' 운동은 두 당 집행부에 적극적인 연대를 촉구했고, 더 나아가서는 좌파 대통합 가능성까지 타진했다.
사회운동 내의 새로운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이제까지는 노동조합운동과 환경운동 사이에 의견 충돌과 긴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가속화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최근 네덜란드노동조합총연맹(FNV)은 기후-생태운동과 함께 '기후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나섰다. 생태 전환을 기후위기 대응뿐만 아니라 불평등 해소 기회로 만드는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결국 노동당과 녹색좌파는 이런 흐름들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1년 총선 직후 노동당과 녹색좌파는 두 당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빠질 경우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각기 따로 보수파, 중도파와 협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1년 뒤 지방선거에서 선거연합을 결성한 다음부터는 주 선거, 상원 선거, 유럽의회 선거 모두 공동 대응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당, 녹색좌파 모두 2021년부터 양당의 협력과 연대, 통합 여부를 놓고 당원투표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노동당은 2021년 8월에 "노동당이 다른 좌파정당들과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가"를 비롯해 7개의 물음을 당원투표에 부쳤다.
이 투표에서 당원들은 다른 좌파정당들과 협력하는 데 찬성하면서도(92.8% 찬성) 녹색좌파와 곧바로 공동의원단을 구성하는 데는 반대했다(54.5% 반대). 그런가 하면 "장기적으로도 녹색좌파와 합당할 가능성은 없다"는 항목에는 대다수(81.1%)가 반대했다. 아직은 녹색좌파와 협상을 해봐야 한다는 입장이 상당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합당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 다수였던 것이다.
이후 노동당과 녹색좌파가 각기 실시한 당원투표에서는 매번 두 당의 협력 방침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올해 7월에 마지막으로 실시한 두 당의 당원투표에서는 총선에 '녹색노동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공동후보명부를 제출하자는 방침이 노동당의 경우 87.9%, 녹색좌파의 경우 91.8%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두 당은 노동당 소속인 팀머만스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공동후보명부를 제출했고, 두 당의 정책연구소는 '정의로운 전환'을 중심에 둔 공동 공약을 작성했다. 또한 노동당과 녹색좌파 사이에 이중당적을 허용해, 노동당 당원이 녹색좌파에 입당하고 녹색좌파 당원이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게 했다.
대표적 좌파정당들이 이렇게 새 진용을 꾸려 뛰어든 선거의 판세는 지난 두 차례 총선과는 사뭇 달랐다. 녹색노동연합은 여론조사에서 자유민주국민당, 자유당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각축을 벌였다. 선거 막판에 자유당이 상승세를 타는 바람에 일단은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라는 결과와 마주하게 됐지만 말이다.
단순한 선거연합인가, 적색-녹색 융합의 시작인가
극우 자유당이 제1당이 됐다고는 해도 자유당이 반드시 집권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녹색노동연합은 물론이고 다른 우파, 중도파 정당들도 자유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당을 배제한 연립정부가 결성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경우에는 자유당 다음으로 많이 득표한 녹색노동연합이 연정 구성 주도권을 쥐게 된다. 혹은 끝내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해 총선을 다시 실시하게 될 수도 있다.
한데 이와는 별개로 우리가 계속 주목해야 할 흐름이 있다. 녹색노동연합으로 첫 번째 결실을 맺은 노동당과 녹색좌파의 긴밀한 연대가 그것이다. 총선 이후 두 당의 협력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두 당이 공히 직면했던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려던 일시적 선거연합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복합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와 생태주의의 융합을 앞서서 열어나가게 될 것인가?
지금 네덜란드를 넘어 세계 모든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후자의 생생한 사례다. 녹색노동연합이 이번 총선 성적이나 연정 구성 여부와 상관없이 꿋꿋이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이유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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