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 신구·‘열정’ 박근형 황금 밸런스… ‘고도’의 무대는 이미 뜨겁다
“가자.” 에스트라공(신구)이 말했다. “안 돼. 고도를 기다려야지.” 블라디미르(박근형)가 다시 말린다. “아, 그렇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다시 멈춰 선다.
27일 오후 대학로 한 빌딩 5층의 천장 낮은 연습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런스루(run-through· 실제 공연처럼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진행하는 연습) 중인 배우들의 에너지로 실내가 후끈하다. 주요 배역을 맡은 네 배우의 합계 나이 315세, 연기 경력을 합산하면 228년인 것으로도 화제였던 작품. 이들은 매주 한두 번 휴식일을 빼곤 거의 매일 연습실로 출근해 런스루를 반복하고 있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는 각각 신구(87)와 박근형(83). 휴식시간에도 서로 대사를 맞추느라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특히 박근형은 이 연습실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늘 힘차게 뛰어다닌다. ‘오래 끌면 관객이 지루하다’며 대사에 가속을 붙이면서, 당초 인터미션 20분 포함, 180분쯤이던 공연 러닝타임을 160분쯤까지 줄여 놓은 1등 공신이다.
신구는 그 박근형의 에너지를 흡수해 서늘한 바람으로 바꿔 객석으로 흘려보내는 태극권 고수 같다. 심장박동기를 달고 3시간 가까이 매일 무대에 서는 걸 염려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연습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다리에 힘이 붙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지켜보는 제작진이 놀라고 있다. 박근형의 대사가 빠르게 달리면 신구의 낮은 목소리가 브레이크를 걸고, 신구가 감정을 폭발시키면 박근형이 푹신하게 받아 안는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차가움과 뜨거움, 냉철함과 열정의 밸런스는 이 무대가 보여줄 아름다움의 핵심이 될 것이다.
81세 배우 박정자는 목줄을 맨 짐꾼 ‘럭키’를 자진해 맡았다. 지식과 인습의 감옥에 갇혀 노예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 그 자체.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고 모자를 씌워줬을 때, 쉼표도 없이 8분여 내달리는 그의 독백은 이 연극의 가장 힘 있고 놀라운 장면 중 하나다. 64세 막내 김학철은 럭키를 노예처럼 부리는 지주 ‘포조’로 로 등장해 끊임없이 목줄을 잡아당기고 채찍을 땅에 내리치며 회중시계나 파이프처럼 잃어버린 소유물을 찾아 헤맨다.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뚱딴지 같은 대사들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대배우들과 함께 연습하는 어려움을 묻자, 오경택 연출가는 “선생님들이 에너지가 넘치신다”며 웃었다. “추석 연휴 뒤 다시 모였을 때부터 ‘몸으로 외워야 하니 어서 동선을 달라’고 재촉하셨어요. 그때부터 계속 런스루를 반복하고 계신 거예요. 그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오히려 진정시키면서 끌고 가야 하니, 연출가는 그저 행복하죠.”
같은 대사도 이 경험 많은 배우들의 입을 통해 나오면 전혀 새롭게 들린다. 마법 같다. 짐꾼 럭키와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떠나려던 지주 포조가 “어째 떠날 마음이 안 나는데” 하면 고고는 “그런 게 인생이죠” 하고 받는다. 원래 미련 없는 척 하는 이들이 가장 집착하는 법이었다.
50년 넘게 고도를 함께 기다려온 디디는 고고에게 “너랑 사는 거 힘들어” 하고 말한다. “그럼 헤어지는 게 낫겠네.” 툭 던지는 고고의 말을 디디가 퉁명스럽게 받는다. “넌 맨날 말로만 그러고 다시 나타나잖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이 가진 깊이를 무대 위에 드러내는 건 역시 배우들의 힘이다.
오래 함께 연습하다 보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배우들의 따뜻한 면모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잠깐씩 앉는 연습실 테이블에서 박정자와 신구는 옆자리. 제작사 파크컴퍼니 박정미 대표는 “테이블 밑에 난로가 하나 있는데, 서로 상대가 추울까봐 안 볼 때 슬쩍 상대방 방향으로 난로를 돌려 놓곤 하신다”며 웃었다.
신구와 박정자는 무대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박정자와 박근형은 함께 서는 첫 무대. 노배우들이 서로에게 감탄하면서 자극을 받고, 더 최선을 다해 연기에 임한다. 이런 시너지 효과는 관객에게 최고의 무대로 돌아올 것이다.
2막 중간쯤, 열 명 넘는 낯선 이들에게 이유도 모른 채 얻어맞은 고고에게 디디는 “우린 행복하다”고 외치자고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행복하다!”고 외친 뒤 고고가 묻는다. “그래,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디디는 다시 답한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이 오래된 물음에 대해 배우들이 내놓을 답을 무대 위에서 확인하기까지, 이제 22일이 남았다. 공연은 내달 19일부터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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