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엔 오지 않은 고도… 그들 앞엔 올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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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외투를 걸쳐도 한기가 느껴지는 연습실.
차가운 바닥 위에 87세 배우가 맨발로 섰다.
배우들의 이마엔 땀이 맺혔다.
극단 산울림이 1969년부터 2019년까지 약 1500회 공연하며 22만 관객의 사랑을 받는 동안 전무송, 정동환 등 많은 배우들이 거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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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박근형-박정자-김학철 출연… 모두 단일 배역으로 두달간 공연
실제와 닮은 역할 맡아 티격태격… “우리 또 모일 수 있을까” 질문도
블라디미르 역(디디)을 맡은 박근형 씨(83)와 고고 간 밀도 높은 대화는 나무 하나, 바위 하나 놓인 무대를 빼곡히 채웠다. 인생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유와 허무맹랑한 농담을 오가는 맥락 없는 대사를 서로의 눈빛과 동작을 읽으며 퍼즐처럼 맞춰냈다. 배우들의 이마엔 땀이 맺혔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 연습 현장을 27일 찾았다.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다음 달 19일 개막하는 사뮈엘 베케트(1906∼1986)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주인공 고고와 디디가 고도라는 인물을 50여 년간 기다리는 내용의 부조리극이다. 극단 산울림이 1969년부터 2019년까지 약 1500회 공연하며 22만 관객의 사랑을 받는 동안 전무송, 정동환 등 많은 배우들이 거쳐 갔다. 이번 작품은 공연 제작사 파크컴퍼니가 맡았다.
인생에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려본 고목들이 빚어낸 연극은 경이감을 줬다. 포악한 지주 ‘포조’ 역의 김학철 씨(63)와 목줄을 맨 짐꾼 ‘럭키’ 역을 맡은 박정자 씨(81)를 포함한 네 사람의 연기 경력은 도합 227년. 동아연극상 수상 횟수도 총 8번에 달한다. ‘국내 최고령 고고’인 신 씨가 박근형 씨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 잠에 빠져드는 모습은 하염없는 희망에 기대어 사는 인간의 무게와 허무함을 끌어안은 듯했다.
연극계를 대표하는 원로 배우들임에도 연습 때마다 ‘노력 경쟁’이 불붙는다. 박정미 파크컴퍼니 대표는 “연습 첫날 박정자 배우가 쉼표 하나 없는 8분짜리 고난도 독백을 모두 외워와 모두가 놀랐다. 서로 앞다퉈 대본을 암기하는 데 자극제가 됐다”고 말했다. 박정자 씨가 연기하는 럭키는 굽은 등과 질질 끌리는 발, 무력한 표정이 마치 평생을 짐꾼으로 산 듯했다.
그런 럭키에게 “일어나!”라며 소리치는 김 씨의 쩌렁쩌렁한 발성은 낮은 연습실 천장을 울렸다. 김 씨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동안엔 대본에 밑줄을 치고 메모하며 대사를 익혔다. 대본은 검정 펜과 빨간 펜, 형광펜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는 “도통 외워지지 않는 대사는 집 벽에 붙였다. 끊임없이 읽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근형 씨는 연습이 시작되는 매일 오후 2시보다 일찍 와 2막의 노래와 춤으로 몸을 예열한다.
연습이 끝나도 작품에 대한 논의는 이어졌다. 박근형 씨가 “어떤 대목에서 관객 웃음이 터질지 미리 고민해봐야 한다. 내일까지 하나씩 골라 오자”며 운을 뗐다. 소년 역을 맡은 김리안 씨가 “고고의 바지 흘러내리는 장면”을 꼽자 김 씨는 “그래, 빠질 수 없는 원초적 웃음이지” 받아쳤고, 신 씨는 “(공연)해봐야 알지”라고 했다. 오경택 연출가는 “출연진의 실제 성격도 각자 배역과 닮아 있다. 디디는 사람들을 이끌고, 고고는 촌철살인 위트를 툭툭 던진다. 티격태격 호흡을 맞추는 재미 덕에 연습이 힘들어도 다들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모든 배역을 단일 캐스트로 진행한다. 같은 조합으로 다시 공연이 오를 가능성이 있을까. 네 배우는 “그때도 우리가 살아 있으면…”이라고 입을 모았다. 내년 2월 18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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