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기억하는 사람이 바보인 정치
기후변화의 책임은 너무나 거대해서 결코 고작 몇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등 스위치를 켜거나 비행기 표를 사거나 투표를 잘못할 때마다 우리 모두가 미래의 자신에게 고통을 떠안긴 것이다. 따라서 각본의 다음 장을 써야 할 책임 역시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기후를 파멸시키는 방법을 찾아냈으므로 파멸을 막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2050 거주불능 지구〉, ‘미래를 낙관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어제를 돌아보며 내일을 생각하는 정치”
짧은 여의도 생활에서 느낀 게 있다. 우리 정치에는 ‘오늘’만 있다. ‘어제’가 없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무감각이다. 어제를 떠올리자고 하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 된다.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밀려난다. 역사의 교훈은 말해서 무엇하랴, 정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일’도 없다. 일단 오늘 권력을 갖는 게 중요하다. 내일은 그 뒤의 일이다. ‘오늘’, 오늘만 반복된다. 필요한 이야기, 적절한 인물을 오늘 모두 써버린다. 마치 내일 자신들만 남을 것처럼 오늘 죽자 살자 거친 언행을 불사한다. 이슈가 이슈를 밀어내고,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 백년대계는 말해서 무엇하랴, 정치에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정치인 한 사람을 보면, 한 집안이나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동량지재(棟梁之材)다. 처음부터 오늘에 안달복달했을 리 없다. 나라의 어제에서 뜻을 찾아 국민의 내일을 걱정했을 사람들이다. 다만 기회를 보다가 뜻을 묵혀버리거나 권력이 주는 이익에 취해 어느새 뜻이 있었는지조차 잊은 듯하다. ‘그놈이 그놈’으로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좋은 인재들을 친(親)·비(非)로 나눠 사익을 앞세우는 사이, 국민을 위해 무엇을 설계하고 있는지, 정치가 안갯속에 숨고 말았다.
무이념(無理念)의 오합지중이 머릿수 입수만 묶어서 자리를 노리고 강요하는데 어찌 통일된 정책과 방안을 만들 신념과 힘이 생기며 백성이 어찌 또 그것을 신용할 수가 있겠는가. 여(與)·야(野)와 보수·혁신을 막론하고 오늘 우리나라의 정당은 이 타성을 벗어난 게 하나도 없다. 사회단체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매달려서 얼마의 돈을 타 쓰고, 깃발을 들어주고 또는 때에 맞추어 사진을 팔고 조각품을 팔고 뼈다귀를 파는 따위, 애국을 파는 장사꾼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는 게 민망하기 짝이 없다.
- 조지훈, 〈지조론〉, ‘붕당구국론’
오늘의 풍경 같지만, 조지훈 선생의 1961년 글이다. 선생은 ‘3·15 부정선거 모의에 사표를 던진 장관이 한 자(者)도 없을 때’, 민족의 의기를 슬퍼했다.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좋은, 언행이 일치해 솔선 궁행하는 사람, 앞날의 정치적 생명을 개의하지 않고 목숨까지 걸어 국정의 대의에 임하는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라 했다. 선생은 ‘당파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요사스러운 당파, 가짜 당파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한다. 여야 막론, 진실한 이념으로 뭉친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 안개를 걷어내는 일이다.
‘평범하지만 위대한 국민’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근현대사에서 쓸 만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너무 많이 죽었다. 의문의 죽음과 고문, 납치, 추방으로 사라진 인물이 다반사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전적으로 국민의 힘이지만, 홀로 깨끗할 수 있었으나 인물 부재의 적막을 헤치고 진흙탕에 기꺼이 발을 담근 정치인이 있어 가능했다. 다행히 이제 인물은 넘친다. 임금 곁을 어슬렁대지 말고, 뜻을 위해 사익을 내려놓아야 할 뿐이다. 오늘의 혁신성장과 복지, 내일의 한반도 평화와 기후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걸어나갈 사람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뒤에 자신을 주시하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물론 오늘은 너무나 중요하다. 오늘 시작하지 않은 일은 내일에도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그 오늘은 어제의 약속을 기억하는 오늘이어야 하고, 내일로 이어질 오늘이어야 한다. 어제와 오늘, 내일을 서사로 엮으면서 오늘 할 일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정치라 여긴다. 인물을 넉넉히 담아내고 뚝심 있게 전진할 수 있도록 버텨주는 든든한 정당이 있어야 가능하다.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은 오늘만 바라본 대표적 사례다. 산업계의 2030년(2018년 대비) 탄소배출 감축 목표치를 11.4%로 조정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설정한 14.5%보다 3.1%포인트 낮다. 윤 정부는 ‘기업 경쟁력’을 이유로 들었지만, 문제는 진정성이다. 이번 정부 임기인 2027년까지 매년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1.9%로 삼았다. 2023~2027년 약 5천만t, 2028~2029년 약 5천만t에 이어 2030년 1년 만에 약 1억t을 감축한다는 계획이다. 2030년까지 감축해야 할 총량의 75%를 다음 정부로 넘겨버렸다. 혁신을 미뤄도 된다는 시그널로 장기적인 기업 경쟁력도 약화했다. 무책임하고 무성의하다.
낡은 이익 카르텔에서 과감히 손 떼야
국민은 1990년 2.3㎏에 이르던 1인당 하루 생활 쓰레기양을 종량제를 전면 도입한 1995년 1.06㎏으로 줄여냈고, 지금까지도 1㎏ 내외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재활용률은 67.1%에서 86.1%로 올렸다. 우리 기업들도 수년 전부터 환경·사회·지배구조 같은 비재무적 성과를 중시하는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경영전략을 세우고, 석탄사업을 중단하는 대신 RE100(Renewable Energy 100%)과 탄소중립 선언으로 에너지전환에 앞장서고 있다. 국민은 일상 속 작은 실천으로 지구 살리기에 동참하고, 기업은 녹색산업과 순환경제로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는 낡은 이익 카르텔에서 과감히 손을 떼야 한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오늘에 머물러선 안 된다. 국민과 기업에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 힘겨운 오늘을 제대로 사는 길이며 희망으로 이어진 내일의 길을 여는 방법이다.
제조업의 비중이 높고 철강·석유화학을 비롯하여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 많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를 딛고 농업 기반 사회에서 출발해 경공업, 중화학공업, 아이시티(ICT)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하며 경제성장을 일궈온 우리 국민의 저력이라면 못해낼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배터리·수소 등 우수한 저탄소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디지털 기술과 혁신역량에서 앞서가고 있습니다. 200년이나 늦게 시작한 산업화에 비하면 비교적 동등한 선상에서 출발하는 탄소중립은 우리나라가 선도국가로 도약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어려우면 다른 나라들도 어렵고, 다른 나라가 할 수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극복하며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케이(K)-방역은 세계의 표준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2050 탄소중립 비전’ 역시 국민 한분 한분의 작은 실천과 함께하면서 또다시 세계의 모범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문재인, ‘대한민국 탄소중립 선언’, 2020년 12월10일
우리가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국민과 기업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매트 미들리는 매콜리 경(토머스 배빙턴 매콜리)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 연보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씌어 있는 것은 개인들의 노동이 이뤄낸 업적이다. 정부가 낭비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창조하고, 침략자들이 파괴하는 무엇이든 수리해낸다. 전쟁과 세금, 기근과 대화재, 해로운 금지령, 더 해로운 보호무역과 힘겨운 투쟁을 벌이면서 말이다.”(‘카탈락시, 2100년을 바라보는 이성적 낙관주의’)
기다리는 사람아, 어서 오라
분명한 것은 기후변화가 어떤 한 국가의 문제이거나 특정한 정부나 기업, 개인에게 한정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보다 훨씬 큰 강도로 기술발전을 이뤄야 에너지 전환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가 국민과 기업의 고단함, 전 정부의 담대한 도전을 폄훼하고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는 일은 두말할 필요 없는 근시안이다.
정부와 정치가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때마다 전임 정부를 탓한다고 무능이 감춰지지 않는다. 변명은 도리어 자신을 깎는다. 혹여나 누가 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용산’과 ‘여의도’를 떠나야 한다. 그 곳은 내일을 바꿔내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오늘의 치욕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자리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이 바쁘다. 후퇴하는 일은 늘 있는 법이다. 숨을 고르고 내일, 아직 얼굴을 알 수 없는 후손을 생각하며 옷깃을 여며야 한다. 어제를 돌아보며 오늘을 책임지고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맞이해야 한다. 정치 변화도 탄소중립도 우리는 결국 해낼 것이다. 새로운 인물을 목놓아 기다렸던 조지훈 선생의 염원도 그렇게 이뤄질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아 어서 오라. 성인(聖人)이 나면 봉황(鳳凰)이 온다더니 봉황은 오지 않고 까막까치만 우짖누나.
- 조지훈, 〈지조론〉, ‘인물대망론’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지조론>, 조지훈 지음, 나남출판 펴냄, 1996년
<이성적 낙관주의자>,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펴냄, 2010년
<2050 거주불능 지구> ,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지음, 김재경 옮김, 추수밭 펴냄, 2020년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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