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돌아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겨레 2023. 11. 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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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학살의 현장을 수전 손택이 찾았다. 총포탄이 쏟아지는 곳에서 시민들과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촛불만 켜둔 공연장에 사람들 눈빛만 오롯이 빛났다. 이 연극에서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 자다. 움직이지 않고 말만 쏟아내는 이들이 한없이 기다리는 자가 ‘고도’다. 오지 않으면 찾아가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사라예보에 있는 코바치 순교자 추모 공원.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해가 지자 나무를 태우는 냄새가 난다. 해가 부쩍 짧아져 강아지를 데리고 나서면 어둠이 저만치 먼저 앞서 있다. 그 어둠을 따라가면 연기가 퍼져 오른다. 먼저 집에 온 사람이 아직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서둘러 벽난로에 나무장작을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 마치 밥 짓는 냄새처럼,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장작불 냄새에 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벽난로 연기는, 돌아올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마법이고, 그래서 때로는 애잔한 기다림이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게도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짙은 냄새, 저녁의 연기.

나의 프랑스 친구는 몇년 전 식구를 모두 잃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는 또렷하고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도 어두워지면 불을 지핀다. 작은 도끼로 거칠게 나뭇조각을 잘라내어 하나둘씩 넣다 보면, 곧 아이들이 돌아온다는 생각에 한조각을 보태고 또 보탠단다. 그렇게 무수한 나뭇더미를 넣다 보니 불은 확 달아올라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오르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쏟아진다. 그제야 그는 돌아오지 못함을 기억해낸다.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도, 해가 지고 행여 찬 바람이 불면 그는 다시 벽난로 앞에 앉는다. 지랄맞은 연기 때문에 그는 또 운다.

동네 언덕에 올라서면, 공동묘지가 있다. 한적하고 포근하다. 공동묘지 벽돌담은 유난히도 높아서, 돌아옴과 돌아오지 못함이 날카롭게 갈라진다. 저렇게 구분 지어야 살아남은 이들이 살아가는 것이겠지. 그러나, 저런 담마저 사치스러운 나날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는 삶과 죽음의 날 선 경계조차 없다. 온종일 폭탄이 쏟아지고, 오늘 죽음을 보내는 자들이 내일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의 순서와 논리도 없다. 장작을 때며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잔인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수전 손택의 말이 옳다. 전쟁이 정상상태이고 평화가 예외적 상태다. 우리는 마치 평화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습관적으로 착각하면서, 우리의 잔인성을 잊고 산다. 그 결과는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전쟁이다. 전쟁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사실 우린 전쟁을 일삼는다. 그러니 변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기어이 돌아오고, 곧 끝난다면서도 속절없이 계속된다. 변하는 것은 단 하나.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의 수만 늘어간다.

1996년 포위전 이후 파괴된 사라예보.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라예보도 그랬다. 1992년 총성 한발을 신호로 사라예보는 세르비아 민병대에 포위되었다. 유럽에 ‘무슬림의 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포격뿐만 아니라 무차별 저격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던 일은 무려 1500일간 계속되어 1만1천명 넘게 죽었다. 아이들도 저격수의 총탄을 피하지 못했다. 살상 현장은 “사라예보 포위전”이라고 짐짓 점잖게 불렸지만, 늘 그랬듯이 ‘학살’이 ‘학살’로 불리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잔인하면서도 그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을 잔인할 만큼 싫어한다.

학살의 현장을 수전 손택이 찾았다. 총포탄이 쏟아지는 곳에서 시민들과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촛불만 켜둔 공연장에 사람들 눈빛만 오롯이 빛났다. 이 연극에서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 자다. 움직이지 않고 말만 쏟아내는 이들이 한없이 기다리는 자가 ‘고도’다. 오지 않으면 찾아가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사라예보에도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온 도시가 공동묘지가 되고서야, 반쪽 난 일상이 ‘평화’의 이름으로 찾아왔다.

30년이 흘러 가자지구가 포위되었다. 한강의 불꽃축제 때처럼 포탄이 쏟아진다. 불과 한달도 채 안 돼 이미 사라예보의 죽음 수를 넘었다. 역시 변하는 것은 없다. 설마 했던 일은 기어코 일어나고, 시작을 알지 못했으니 끝을 알기도 힘들다. 죽음의 이유도 알지 못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따지지 못하니, 아직 따뜻한 주검을 끌어안고 아침마다 길거리에서 흐느낄 뿐이다. 폭격의 연기만 자욱한 아침에 ‘우리’는 없다. 타인의 고통에 쉽게 “우리”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손택의 경고만 아프게 만지작거린다.

공동묘지를 돌아 가로등 불빛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 길은 갑자기 좁아지고, 비탈진 내리막이 시작된다. 장작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총총히 찾아가는 골목. 안개와 가로등이 서로 감싸 안는 아침에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비탈진 골목 앞에는 참전용사 이름을 새긴 기념비가 서 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영원히 기다리는 방식이다.

서울 이태원의 어느 가파른 골목 입구에는 아직 꽃들이 기억하고 기다린다. 얼마 전 이 골목을 기억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제목은 ‘별은 알고 있다’. 꽃도 알고 별도 아는 일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총알 한발 발사되지 않았으나, 그날 밤 이태원은 포위되었다. 지금 단지 총알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포위’라는 사실은 간단히 부정되고 있다. 인간의 잔인성은 마치 인공지능처럼 진화한다. 은밀하고 치밀하다.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포위’되어 죽었다. 죽음의 이유는 분명했으나, 아직 죽음을 둘러싼 말들은 모호하다. 그래서 김용균을 기억하는 전시의 제목은 ‘유감’이다.

치밀한 잔인성과 싸운다는 것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일과 같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것을 위해 오늘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겠다. 10년 전 일이라 모두 까맣게 잊고 있는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아직 싸우고 있다. 아직도 송전탑을 뽑아달라고 싸우고 있다. 왜 아직 그러느냐고 묻자 할머니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모르지. 내 살아생전에는 송전탑이 안 뽑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괘않다. 느그가 있잖아. 느그가 있는데 뭔 걱정이고. (…)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뽑히면 그만이지. 느그가 할 거잖아. 나는 걱정 안 한다. 그라이 지는 싸움도 아니지.” 이런 생각을 평생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싸우기도 전에 늘 졌던 것이다.

골목을 다시 돌아선다. 늦게 집에 들어선 사람들이 나무를 태운다. 연기가 자욱하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젖은 장작으로 불을 피운다. 그래서 연기는 늘 매섭고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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