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cm 신장으로 파워센터 딕슨까지 막아봤습니다”
명지고 이민재(36‧189cm) A코치는 잡초, 바위 등으로 불린다. 평균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려한 선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으며 특유의 생명력(?)을 뽐냈기 때문이다. 1점대 평균 득점에 나머지 어시스트, 리바운드 기록등도 채 1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38경기나 뛰었다.
프로무대는 냉혹하다. 사람이 좋다고, 열심히 한다고 출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한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한시대를 풍미했어도 기량이 쇠퇴하고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칼바람을 맞을 수도 있는 세계다.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가 10여년 동안 코트를 밟을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풀어보자면 쓸모가 있었다는 소리다.
이는 FA 계약을 6회 이상 체결한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출장시간도 적고 연봉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SK 나이츠, 창원 LG 세이커스, 부산 kt 소닉붐, 안양 KGC인삼공사 등을 오갔다. ‘이제는 정말 힘들겠구나‘ 싶은 순간 다른 팀에서 손길을 내밀었다.
대학 시절의 그는 나름 다재다능한 포워드였지만 프로에서는 생존을 위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꿨다. 일단 코트에 나서면 시간에 관계없이 그야말로 수비에 온몸을 불태웠다. 벤치 멤버가 눈에 띄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필요했던 부분인지라 ’죽느냐 사느냐‘는 각오로 임했다고한다.
그의 주 포지션은 스몰포워드다. 하지만 수비시에는 그런 것은 크게 의미 없었다. 활동량과 에너지레벨로 승부해야 했던 상황에서 감독이 갑자기 ’너, 나가서 쟤 막아‘ 그러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상대해야 했다. 같은 스윙맨은 물론 발 빠른 앞선 가드진부터 자신보다 훨씬 큰 빅맨들까지 가라지 않았다. 그중에는 토종 최고 센터인 서장훈(49‧207cm)은 물론 역대 최고 파워형 외국인빅맨으로 꼽히는 나이젤 딕슨(43‧201.7cm)도 포함된바 있다.
“모르는 분들 중에는 무슨 뻥을 그렇게 대차게 치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서장훈 선배님과는 거의 20cm가 차이나거든요. 농구에서 그 정도는 아예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봐도 맞아요. 더욱이 그냥 크기만한게 아니라 기량도 엄청나셨잖아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래도 인정하는 분들이 좀 계신데 딕슨 이름이 나오면 말도 안돼라는 반응부터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딕슨은 역대 국내 최장신 센터 하승진(38‧221.6cm) 조차 몸싸움에서 튕겨나간 적이 있을 정도로 힘 하나는 외국인선수를 통틀어서도 최고였다. 150kg에 달하는 육중한 체구를 바탕으로 KBL의 샤킬 오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물론 이민재가 그런 빅맨들을 오롯이 혼자 수비한 것은 아니다.
트랩수비를 섞어 쓰는 과정에서 1차적으로 버티거나 최대한 괴롭혀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호리호리한 체구로 최고 빅맨들 수비까지 맡았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악착같고 간절하게 코트에서 뛰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격시에는 장점인 슛을 살려 성공률에 집중했다. 어차피 볼을 많이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지라 한번의 공격에서도 정확성이 요구됐다. 이른바 3&D 플레이어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 이민재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138경기 출전(진행형) 평균 1.7득점, 0.6리바운드, 0.3어시스트, 0.3스틸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3년 10월 25일 원주 동부전 = 13득점 / 3점슛 성공 ☞ 2014년 11월 24일 고양 오리온스전 = 4개 / 어시스트 ☞ 2018년 11월 13일 창원 LG전 = 3개 / 리바운드 ☞ 2014년 2월 21일 고양 오리온스전 = 5 / 스틸 ☞ 2013년 10월 25일 원주 동부전 = 3개 / 블록슛 ☞ 2013년 10월 18일 창원 LG전 = 2개
“농구하고 분식점하고 어떤 것이 더 힘들었냐고요?”
Q.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분식점을 하고 있던 것으로 있었는데 명지고 코치로 들어오셨어요?
아네, 전형수 코치님의 부름을 받고 지난 해부터 명지고 A코치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농구 선수 출신이 분식점을 하는게 많은 분들 눈에 인상적으로 보였나봐요. 저보면 분식점부터 떠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으시니까요. 오히려 선수 시절보다 분식점하면서 더 알려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에요.(웃음) 분식점은 지금도 하고 있어요. 레시피 등도 완성이 된 상태인지라 몇 달전에 가족들에게 인수인계했어요. 오토매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족들 역시 처음에 제가 그랬듯 자영업 경험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걱정도 됐지만 현재는 제가 없어도 척척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요. 제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이죠. 아예 그쪽에 신경을 안쓸 수는 없지만 명지고 A코치로 있는 이상 전코치님을 도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우선이니까요.
Q.가족들에게 인수인계한지 몇 달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전에는 겸업을 한 것인가요?
그랬죠. 그래서 처음에는 고민이 좀 많았습니다. 일단 전코치님이 연락을 주신 것은 너무 감사하고 반가웠습니다. 선수 시절에도 그랬지만 저는 농구에 대한 갈망이 많은 사람이에요. 잘하든 못하든 코트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분식점이라는 것도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어서 생계를 위해 하게 된 일이니까요. 하지만 분식점에 대한 애착도 적지는 않아요. 한 1년 정도 돈 한푼 못벌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다가 이제 겨우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던지라 분식점 문을 닫아버리기도 힘들었어요.
Q.1년 정도 돈을 거의 못 벌었다고요? 금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겠네요.
맞아요. 제가 힘들다는 표현은 많이 쓰는 편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평생 농구만 하던 손으로 요리를 하고 가게를 운영한다는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1년 동안은 주방에서 일을 했는데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쉬는 날도 없었고요. 어떤 분들은 본래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냐고 물어보시기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단지 농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의식과 경제적으로 잘 되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져 다소 무모하게 덤빈 부분도 있었죠. 그리고 제 성격상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려고 이를 악물었고요.
Q.하고 많은 업종 중에 분식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은퇴하고 6개월간은 무엇을 할까 생각이 정말 많았어요. 자영업자들 커뮤니티에 가입을 해서 잘 나가는 업종 등에 대해서 계속 정보를 공부했어요. 솔깃한 것도 적지 않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장단점도 적지 않은지라 선뜻 결정이 안 내려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친구가 지인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분께서 떡볶이 레시피를 알려주셨어요. 떡볶이는 보통 소울푸드라고 불리잖아요. 남녀노소 다 잘 먹고 유행도 크게 타지 않는 음식인지라 맛있게만 만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더불어 계속 끌기만 하면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서 마음먹은 김에 바로 분식점을 오픈하게 됐죠. 프랜차이즈는 아니고요.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레시피에 저만의 방법을 섞어서 떡볶이를 메인 메뉴로 내세우게 됐어요. 그 외 튀김, 순대, 주먹밥도 있습니다. 오픈한지 2년반 정도 됐는데 지금은 리뷰나 블로그 글 등도 적지 않게 쌓였고 단골들도 많이 늘어나서 뿌듯한 마음이 큽니다. 남양주시 3대 떡볶이집 중에 하나로 불리고 있습니다.(웃음)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에요. 틈날 때마다 들려서 관리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정산이나 발주같은 것도 해야되고 하니까요.
Q.코치 일과 분식점 운영을 겸하던 때는 정말 힘들었을 듯 싶어요.
그렇죠. 사실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전코치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체육관에 있는데 배달웹 알림 소리가 휴대폰에서 계속 들려오고, 어찌보면 이것도 집중 못하고 저것도 집중 못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분식점같은 경우는 제 가게니까 그렇다 치지만 농구를 가르쳐야 되는 체육관에서까지 일이 겹치는 것은 정말 아니었죠. 전코치님은 편하게 천천히 가자고 하셨지만 제 입장에서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고요. 더불어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농구 쪽 일인지라 분식점에 관한 업무를 순차적으로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Q.냉정하게 말해서 농구인중에 오롯이 코치 역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듯 싶어요. 구태여 분식점으로 바쁜 본인을 전형수 코치가 왜 데려왔다고 생각하나요?
창원 LG시절에 선수로서 함께 한적이 있어요. 코치님 아니 당시에는 형수 형이라고 불렀죠. 코트에 나서는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준비하는 등 꾸준하고 성실했던 모습을 좋게 봐주신 듯 싶어요. 믿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그래서 최대한 빨리 분식점을 인수인계하고 농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Q.옆에서 지켜본 전형수 코치는 어떤 사람인가요?
코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평가하기 어려워요.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어요. 다만 저도 열심히 해서 코치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하고 있죠.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부러운 점이 많아요.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으세요. 코트에서는 카리스마있는 모습도 있지만 밖으로 나오게 되면 정말 선함이 뿜뿜 풍겨나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모습 등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요. 늘 그렇게 살아온 덕분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정말 적이 없어요. 다들 코치님에 대해 ’정말 좋은 사람이다‘고 말해요. 어딘가에는 코치님을 싫어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저는 보지 못한 것 같아요.
Q.어차피 잘 모르는 장사를 하려면 스포츠용품점 등 상대적을 더 편한 일도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분식점을 하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어요?
그러게요. 솔직히 말하면 자리를 잡지못하던 1년 동안은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주방에서 온종일 시간을 바쳤는데 결과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운영비도 모자라서 대출도 받고 한 8천만원 정도 까먹은 것 같아요. 무상으로 일한 것까지 합치면 실질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손해를 봤다고 보는게 맞겠네요. 그래도 농구할 때도 그랬지만 제가 성격이 한번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편인지라…, 악으로 깡으로 버티었던 것 같아요. 구태여 비교하자면 농구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농구야 제가 좋아서 하던 것이지만 음식은 얼떨결에 손을 대서 말 그래도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좋아서 시작한 농구, 항상 즐겁지만은 않더라고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건가요?
아버지도 농구인이셨어요. 이 강자 초자 쓰십니다. 군산중학교에서도 지도자로 오래 계셨고요. 아무래도 어릴 때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아버지도 농구 쪽에 계시고 주변 분들 중에서도 농구와 관련된 경우가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아버지 출근하실 때 같이 따라 나갔어요. 공부보다는 뛰어 노는게 좋더라고요. 코트에서 형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즐거웠어요. 그렇게 농구공을 좋아하게 된 후 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Q.아버님도 농구인이신지라 아들이 농구를 한다니까 반가워하셨겠네요?
아니요. 처음에는 반대하셨어요. 예전 스포츠하면 혹독한 훈련과 강한 군기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녔잖아요. 아버지 세대 때는 더욱 그랬겠고요. 본인께서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끼신 케이스라 아들이 힘든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계속 농구를 한다고 하니까 어느 날 약주 한잔 하시고 오셔서 ’농구 진짜 좋아하냐?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겠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솔직히 당시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아버님의 속뜻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그저 농구가 좋으니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죠.
Q.중학교 시절 아버님의 지도를 받았잖아요. 여전히 사이는 좋았나요?
아니요. 그때 많이 멀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출근하고 같이 따라다니고 말도 편하게 하고 그랬는데 지도자와 선수로 만나니 그게 힘들었죠. 혼도 많이 나고 맞기도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다른 친구들 한 대 맞을때 저는 두 대 세대 맞았죠. 오죽하면 다른 학부형들이 보고 ’쟤는 누군데 유독 심하게 혼나고 있지?‘라고 궁금해 할 정도였어요. 지금와 생각해보면 아버지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컸을거에요. 아들이라고 편애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려고 유독 엄격하게 하셨던 거죠. 저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혼나거나 맞고 나면 유독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학창시절 내내 적지 않은 체벌을 받았지만 좀처럼 울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아버지에게 혼나는 날은 유독 울음이 멈추지 않더라고요. 아마도 서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거리가 생겼어요. 어릴 때처럼 자연스러운 반말 같은 것은 엄두도 못냈고요. 집에서 같이 식사할 때도 불편했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우 아니면 부모와 자식이 사제지간으로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들어요. 서로 눈치를 볼 수 있거든요.
Q.아버님도 본인도 군산 출신이라고 하는데, 군산하니까 전설적인 슈터 최철권님이 떠오르네요.
아, 그렇지않아도 군산고등학교 시절 그분 밑에서 1년 동안 농구를 했어요. 코치님이셨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너무 힘들었어요. 훈련의 대부분이 뛰는 것이었거든요. 당시 정말 엄청나게 뛰었어요. 새벽 오전 오후 밤까지 네탕을 오로지 뛰기만 할 때도 많았습니다. 회의감이 몰려왔어요. 농구선수가 아닌 육상선수가 된 느낌까지 들 정도였죠. 많이 엄하기도 하셨고요. 다른 동기나 선배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처음으로 농구를 그만둘까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10년 넘게 있었던 군산중을 떠나 서울 쪽으로 가게 됐어요. 저한테 ’계속 여기서 농구할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전학가서 새로운 환경에서 해볼래?‘ 물어보시더라고요.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어요. 선생님 농구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좀 다른 방식의 농구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역시 오랜시간 동안 좋은 제자를 많이 배출하셨잖아요. 선생님 색깔이 저에게는 잘 안 맞았던 듯 싶어요. 그렇게 새로운 학교를 알아보다가 울산 무룡고로 가게 됐습니다.
Q.울산요? 멀리까지 갔네요?
그렇죠. 하지만 저에게는 농구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지역이 어디든 상관없었어요. 마침 울산에 무룡고 농구부가 만들어졌고 창단 멤버로 갈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요. 서울 광신중에서 2명 내려온 것을 비롯 2미터 가까이 되는 친구도 있었고 전국랭킹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친구까지…, 이래저래 기대가 되더라고요. 고3때 창단 첫 준우승도 하고, 재미있게 농구했던 것 같아요.
“센터까지 수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Q.주포지션은 3번이었는데 센터인 서장훈까지 수비한 적이 있더라고요. 기량은 둘째치고 사이즈 차이가 심한데 수비가 가능했나요?
SK시절 신선우 감독님께서 저를 종종 파워포워드로 기용하셨어요. (김)민수형이 주전 4번이었는데 파울트러블에 빠지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대신 나섰죠. 약간의 변칙성 매치업이었죠. 사실 처음에는 저도 당황했어요. 일단 사이즈에서부터 제가 밀리는데다 이전까지 포스트 수비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아니 그것이라도 좋았습니다. 그렇게라도 코트에 나선다는 자체가 어디에요. 당시 SK가 멤버가 엄청 좋았어요. 민수형을 비롯해 주희정 선배님, 김효범 선배님, 방성윤 선배님 등 그야말로 국가대표급이었죠. 변칙수비 전문이라도 안하면 2라운드 신인인 제가 기회를 받기는 사실상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서장훈 선배님을 맡는 것은 말이 안되잖아요. 저에 대한 정보가 상대 팀에 없는지라 뭐랄까, 기습적으로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기용하신 것 같아요. 저만 당황한게 아니라 상대팀도 당황했을거니까요.(웃음) 사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일대일은 아니고요. 옆에서 트랩수비로 많이 도와줬어요.
Q.그러한 부분을 감안한다해도 대단한데요. 몸도 두껍지않아 힘에 부쳤을텐데요.
서장훈 선배님도 그렇지만 심지어 나이젤 딕슨이라는 외국인선수도 맡았어요. 국내 무대서 오랜 시간을 뛴 것은 아니지만 특유의 덩치와 힘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같은 외국인선수들마저 몸싸움에서 퉁퉁 밀려서 나가떨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경기를 봤거나 기록을 본 케이스가 아니라면 아직도 상당수 분들은 제가 딕슨을 맡았다면 믿지를 않으세요.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진짜로 수비한 적이 있어요. 역시 신감독님 작품이었습니다.(웃음)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이것도 일종의 트랩수비 전략이었어요. 제가 딕슨을 맡으면 상대팀에서는 당연히 이쪽으로 볼을 집중 투입 할 것 아니에요. 그때를 노려 기습적으로 더블팀을 간다거나 스틸을 노리는거죠. 저는 그냥 조금만 버티어 주라는 것이었어요. 그 외 이승준 선배님도 수비한 적이 있고요. 당시 좀 잘 나가는 빅맨들은 많이 막아봤습니다.(웃음)
Q.그리 크지않은 스윙맨이 서장훈, 딕슨, 이승준을 모두 막아봤다면 정말 놀랄일이네요.
솔직히 잘막은 것은 아니에요. 그냥 어찌어찌 버티고 버틴 것이죠. 사이즈가 비슷해도 막기 힘들었을텐데 하물며 저보다 월등히 큰 선수들을 상대로 얼마나 했겠어요. 물론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요. 위에 언급한 3인은 모두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잖아요. 서장훈 선배님은 슛이 좋고, 딕슨은 포스트 파워가 최강이고, 이승준 선배님은 운동능력이 발군이었죠. 잠깐씩이라도 그런 엄청난 선수들을 막아보면서 수비요령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다고 빅맨만 막은 것도 아니에요. 가드 수비도 적지 않게 했는데 특히 단신 외국인선수 전담으로도 한참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빅맨들이야 악으로 깡으로 몸싸움을 버틴 부분이 커요. 반면 발은 빠른 편인지라 단신 외인들을 상대로는 적어도 따라붙는 것은 잘했습니다. 거기에 우리 팀이 리바운드를 잡으면 신속하게 상대편 림쪽으로 달려갈 수 있는지라 트랜지션 플레이에서도 강점이 있었어요. 당시 감독님이 기회를 많이 주셨던 배경에는 다용도 수비와 더불어 그런 부분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요.
Q.어떤 면에서는 그렇게라도 기회를 줬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사실 저같은 벤치멤버는 어지간히 열심히 해도 눈에 띄지 않거든요. 더욱이 당시 SK같은 경우 초호화 멤버였던지라 진입장벽이 더욱 높았죠. 설상가상으로 선수들 이름 값에 비해 성적도 안 나오던 시절인지라 지도자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을 것이란 말이에요. 지금도 보면 처음에는 여유가 있다가 성적이 안 나오면 더더욱 마음이 급해져서 소수 정예 위주로 라인업을 돌리다가 스스로 늪에 빠지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그럼 점에서 감독님은 정말 대단하셨어요. 나름대로 미션을 주시고 거기에 도달한 선수에게는 이름값에 관계없이 최소한의 기회는 주셨습니다. 2군까지 포함해서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명장 소리가 그냥 나오는게 아니구나 싶어요. 감독님께서 첫 시즌부터 그렇게 동기부여를 해주셔서 ’한번 해보자‘는 의욕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Q.2010년 12월 19일 삼성전이 인생 경기로 꼽힙니다. 7분 28초만 뛰고도 3점슛 3개를 모두 넣으며 11득점을 올리고 수훈선수까지 됐어요.
맞습니다.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서울 라이벌전에 지상파 중계까지 탔던지라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경기였죠. 운 좋게도 그날 슛감이 좋았고 짧지만 굵은 활약으로 수훈선수로 주희정 선배님과 함께 인터뷰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했던 선수도 있었지만 무명에 가까웠던 벤치 멤버가 깜짝 활약을 펼친 부분에 대한 임팩트가 컸나 봐요. 어찌보면 제가 프로선수 생활을 10년이나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된 경기였죠. 적어도 가능성은 있는 선수다라는 어필은 됐다고 봅니다.
Q.첫 수훈선수 인터뷰였을텐데 많이 떨렸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경기도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이 안날 만큼 흥분 속에서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인터뷰실까지 들어가니까 어색하고 낯설고 긴장되고…, 그냥 가슴은 뛰는데 머리는 멍했습니다. 함께 인터뷰하던 주희정 선배님이 농담도 해주시면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신경써주셨어요. 그냥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모드로 멍하니 있는데 선배님이 가볍게 툭 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뭐해? 너한테 질문하고 계시잖아?‘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답변을 했어요. 평소에도 말주변이 없는 편인데 당시는 정말 많이 떨렸습니다.
Q.그래도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었기에 기회가 오지않았을까요?
그렇죠. 제가 다른건 모르겠지만 프로생활 내내 늘 준비하는 자세는 잊지 않았습니다. 저의 목표는 다른 스타 선수들처럼 거창한 것이 아닌 단 1분 아니 1초라도 코트에 서는 것이었어요. 아주 잠깐이라도 경기에 나설 수 있다면 그동안 준비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에 대한 준비는 필수죠. 어차피 경기도 잘 못 나가는 데하고 몸 관리도 대충하고 있다가 갑자기 출장기회를 받게 되었는데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감독님께서도 그런 선수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고싶지 않을 것이고요. 설사 시즌 내내 기회를 못 받는다고해도 프로선수라면 늘 준비는 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Q.정말 필사적인 수비를 펼쳤던 것 같은데, 통화하면서 느낀 성격과는 다소 안어울리는 느낌도 들어요.
네. 제가 거친 성격과는 거리가 있어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좋은게 좋다고 남과 충돌하는 것도 싫어해요. 하지만 코트 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어설프게 하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농구를 못할 수도 있거든요. 저같은 2라운드 출신 무명선수가 자신을 어필해야 되는데 설렁설렁해서 눈에 띄겠어요. 상대가 누구든 코트에서 만큼은 물어뜯을 각오로 나섰죠. 필사적으로 따라다니고 몸싸움하고 때로는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등 더티플레이도 꽤 했습니다. 코트 안에서까지 착하게 굴면 선수를 안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조동현 선배님을 맡아서 정말 터프하게 수비를 했어요. 어깨로 치고 팔꿈치 쓰고 완전히 진흙탕 싸움 모드였죠. 그러자 선배님이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니냐? 적당히 좀 하자‘라고 하시기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하면 저 코트에 못 나설 수도 있어요‘라고 하니까 수긍하시고 가시더라고요. 제 상황을 이해하셨던 거죠. 당시 이런 저의 모습이 선배님 입장에서도 되게 인상적이었나봐요. 군 제대 후 입단 테스트를 거쳐 부산 kt에서 뛴 적이 있는데 당시 감독님이 조동현 선배님이셨어요. 영입을 결정한 데에는 선수 시절 저의 악바리 같은 근성을 좋게봐주신 부분도 있는 듯 싶더라고요.
Q.아참! 방금 군대얘기가 나와서 생각난건데, 현역병 출신이에요.
맞습니다. 상무를 가고싶었는데 가지못했습니다. 4차례인가 시도했는데 모두 미역국을 먹었죠. 당시에 좋은 선수가 워낙 많았어요. 오죽하면 국가대표보다 경쟁률이 더 치열하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니까요. 더욱이 제 포지션이 스몰포워드잖아요. 사이즈라도 크면 희소성으로 어필할 수 있었겠지만 스윙맨 쪽에서는 쟁쟁한 자원이 워낙 많아서 저한테까지 기회가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28살 말에 현역병으로 갔다 오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대대장님이 저의 이력서를 보고 많이 배려를 해주셨다는 부분이에요. ‘제대하고도 선수 생활 할거냐?’고 물으시기에 ‘무조건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헬스장 관리병을 시켜주시더라고요. 나름 시간을 내서 짬짬이 운동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신거죠.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최소한의 운동은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했어요.
Q.선수생활을 하면서 롤모델로 삼았던 선배로는 누가 있을까요?
많죠. 저는 저보다 커리어가 좋은 선수는 모두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잘했으니까 코트에서 그렇게 뛴거죠. 그중에서도 주희정 선배님은 정말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저도 나름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프로 첫시즌 선배님을 보니까 그것은 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당시 노장에 속하셨는데 훈련량은 한참 후배들보다도 월등히 많았어요. 항상 연습시간 한시간 전에 나오셔서 웨이트 하시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훈련에 임하셨어요. ‘유니폼이 흥건하게 젖지 않으면 훈련을 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배울 점이 정말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그런 마인드, 멘탈 등이 너무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랜시간 롱런하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구나 싶었어요.
Q.마지막으로 농구인 이민재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다들 아는 말중에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는 말이 있잖아요. 너무 공감해요. 현역시절로 예를 들어볼께요. 저같은 벤치 멤버들은 장기전에 약해요. 처음에는 ‘나도 주전들과 한번 경쟁해봐야지’, ‘핵심 식스맨은 내 자리야’등 의욕에 불타요. 그러다가 점점 기회가 오지 않고 코트에 나서지 못하게 되면서 지쳐가게 되요. 어차피 뛰지도 못하는 데라는 나태한 생각이 몸까지 지배하게 되죠. 안된다고 봐요. 시즌은 길어요. 부상선수가 나올 수도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주전선수들도 체력적으로 지칠 수 있어요. 준비만 잘하고 있으면 분명 한 번은 기회가 옵니다. 그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사실 시즌 초보다는 시즌 막판에 어필하는게 더 임팩트가 있어요. 연봉협상이라던가 재계약 부분 등에서 유리해요. 감독님 시선으로 볼 때도 ‘잘 다듬으면 다음 시즌에 가능성 있겠는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고요. 무엇보다 시즌 막판까지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죠. 적어도 끈기는 보여 준 것이잖아요. 지도자나 기타 부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라면 늘 준비가 되어있어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죠. 그런 점에서 저의 농구 인생도 이제 시작입니다. 현역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늘 준비하고 공부하는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박상혁 기자, 유용우 기자, 문복주 기자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