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윤정의 식물 이야기 거제수나무] 액운 쫓는 수액을 품은 산신령 같은 백발의 나무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는 이름이 올드하다. 세간 이름 그대로 해석은 액운을 거두어가는 수액을 생산하는 나무다. 재앙의 '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가 나무樹인지, 물水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거제수나무는 고로쇠나무와 함께 이른 봄에 줄기에 상처 내어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다. 거제수나무는 해발 600m 내외의 산중턱에 흩어져 자라기 때문에, 수액을 대량으로 채취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별 이득이 나지 않아, 수액을 생산하는 나무로는 잊혀가고 있다.
수액 탓에 거제수나무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어도, 막상 산에서 거제수나무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이른 봄이나, 잎이 진 뒤 산행에서 광채가 나는 우윳빛 천을 걸치고 성성한 백발을 풀어헤친 듯 신령스레 서 있는 나무를 마주하게 되면, 범상치 않은 기운에, 무슨 나무일까 충분히 궁금증을 가질 만하다. 얇고 흰 수피로 치면 우선 떠오르는 나무가 자작나무인데 그와 뭔가 다른 듯한 느낌이 드는 나무가 바로 거제수나무다.
거제수나무는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자작나무B. platyphylla와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거제수나무에 비해 자작나무는 더 추운 곳에 분포하기 때문에 중부 이남의 산행 길에 자연스럽게 자라는 자작나무를 만나는 일은 흔치않다. 산림청이 자작나무 숲을 강원도 인제군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이유다.

많은 양의 수꽃 동물 귀한 먹이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의 꽃은 꽃잎이 없다. 한 나무에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꽃잎이 없기에 바람을 이용해 꽃가루받이를 한다. 바람을 온전하게 이용하기 위해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는데, 수꽃은 바람에 꽃가루를 잘 떠나보내기 위해 아래로 늘어지고, 암꽃은 꽃가루를 더 잘 받기 위해 가지 끝에 위를 향해 피어난다. 숲에 바람이 일면 수꽃으로부터 노란 꽃가루가 일어난다.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는 꽃잎을 만들지 않는 대신 아주 많은 양의 수꽃을 피운다. 이른 봄, 많은 양의 수꽃은 겨울 동안 굶주린 숲 동물들에게 매우 귀한 먹이가 된다. 피어나는 꽃의 양이 많고 적음에 따라 어린 새끼의 생존율이나 새로운 새끼의 출생률이 결정된다. 꽃가루가 날아간 뒤, 바싹 마른 수꽃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언뜻 징그러운 벌레 떼로 보일 수 있지만 꽃밭이다.

가을 낙엽이 질 때면 씨앗을 품은 열매가 익어간다. 암갈색의 열매다발은 암꽃의 확대판쯤 되겠다. 작은 솔방울을 닮은 거제수나무의 열매는 위를 향해 달리고, 자작나무의 열매는 떨어진 수꽃을 대신해 가지 아래로 처지며 달린다.
씨앗 역시 기다리는 것은 바람이다. 거제수나무나 자작나무의 씨앗은 날개에 싸여 있으며 작고 가볍다. 가을바람이 불면, 씨앗들은 하나 둘 공중으로 날아올라 숲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봄날의 꽃가루처럼 극적으로 피어오르진 않지만, 보통 나무 한 그루당 수만 개의 씨앗이 떨어져 나간다고 하니, 지금 저 눈앞의 거제수나무는 수만 동기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나무의 씨앗(종자)을 보면 그들의 영역확장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거제수나무나 자작나무와 같이 작고 가벼운 씨앗을 만드는 나무들은 햇빛을 좋아하는 습성을 지녀, 깊고 울창한 숲 안보다는 이제 막 숲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곳, 숲의 빈터나 나무 사이, 숲 틈새, 등산로 주변 등 틈새 빛이 도달하는 곳에서 싹을 낸다. 거제수나무가 우리 산야에 흩어져 드문드문 자라는 이유다.

반면 도토리나 밤과 같이 크고 무거운 종자(역시 씨앗이다!)를 생산하는 나무는 숲의 그늘에서도 싹을 내고 어린 시절을 잘 지낸다. 이 종자들은 종자 속 양분을 먹이로 삼는 새나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이 이동시켜준다. 다람쥐는 자신의 겨울 식량을 안전하게 저장하기 위해 도토리를 깊은 숲 여기저기 묻고, 끝내 먹히지 않은 도토리는 봄에 싹을 낸다. 따라서 도토리는 울창한 숲 속 그늘에서 싹을 내고, 여럿이 이웃해서 자랄 가능성도 높다.
자작나무 씨앗의 빛을 향해 날아가는 습성은 북쪽의 상록침엽수림에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삼각형의 수형을 이루는 가문비나무와 그 틈새 빛을 이용해 자라는 자작나무. 겨울이 오면서 자작나무 잎이 다 떨어지면, 하얀 수피와 자잘한 가지다발이 짙고 푸른 삼각형의 가문비나무와 환상적인 대비를 이룬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남쪽지역에선 보기가 드물고, 중부 이북지역, 특히 백두산지역에서 잣나무와 자작나무,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의 환상조합이 이루어진다.
거제수나무, 특히 자작나무를 널리 알린 것은 종잇장처럼 얇고 하얀 수피다. 수피는 나무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정식으로 만들어지는 조직이다. 나무의 중요 직경생장조직은, 조릿대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나무의 줄기 가장자리에 빙둘러 존재한다. 수피는 바로 이 중요한 분열조직을 외부의 충격이나 병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피형성층이라는 별도의 세포층에 의해 만들어진다.

오래전에 만들어져 줄기 바깥으로 밀려난 세포층은 여러 겹으로 쌓여 딱딱한 수피가 되는데, 나무의 직경이 늘어남에 따라 거칠게 갈라터지거나 찢어진다.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는 세포가 가로로 성장하는 얇은 수피세포층을 만들기 때문에 얇고 가로로 찢어지는 수피를 갖는다.
수피는 자체로 숨을 쉬기 위해 숨구멍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피목皮目이라 한다.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의 피목 역시 가로로 길게 자라, 흰 수피 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의 수피도 자세히 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거제수나무의 수피는 자라는 곳이나 나무의 나이 등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해도 광택이 있고 황갈색 내지 크림색을 띠며, 다소 거칠게 벗겨진다.
이에 비해 자작나무의 수피는 거제수나무에 비해 순백색을 띠는데, 이는 추운 곳에서 자라는 자작나무의 적응 방식으로 해석된다. 자작나무 수피 세포 속의 베툴린betulin이라는 성분은 빛을 반사시켜 수피를 흰색으로 보이게 하며, 겨울철 수피의 온도가 섣불리 오르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겨우내 눈 속에 줄기를 묻고 서 있기에 수피 세포 속에 지질성분인 큐틴cutin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이는 물기를 잘 들이지 않고, 곰팡이의 발생을 억제한다. 수피의 이런 성질 덕분에 자작나무는 긴 겨울 동안 흰 눈 속에서 안정적인 겨울잠을 잔다.

흔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함께한 나무
특이적으로 자작나무 수피에는 마치 부릅뜬 눈과 같은 무늬가 생겨 있다. 가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다. 햇빛이 많이 필요한 자작나무는 빛이 부족한 아래쪽 가지는 스스로 떨구는데, 이때 그 흔적이 줄기에 남는다. 내 눈에는 외눈박이 나무 주인이 노려보는 듯해 무섭기까지 하다. 북유럽 사람들은 이런 흔적으로 인해 자작나무를 'Watchful Tree'라고 부른다.
최근 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거제수나무는 조선시대 주로 책판의 재료로 교서관에 납입되었던 자작목字作木이고, 지금의 자작나무는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에서 수피에 기름성분이 많아 방수포로 사용되었던 화목樺木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각지의 산야에 자라며 중요한 목판재료를 제공한 나무가 지금의 거제수나무였다 하니, 거제수나무의 영어식 이름 korean birch가 묘하다. 물론, '한국에서 흔한 자작나무속 나무'라는 의미이겠지만.
거제수나무나 자작나무의 현재 이름에 대해서 굳이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거제수나무 수액을 마시면 정말 액운이 없어지고, 자작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소소한 소망과 낭만은 어느 정도 확인받고 싶다.
오늘날, 자작나무에 비해 거제수나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흔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과거 이용에 의해 그 분포가 축소되었고, 향후 기후변화에 위협받는 우리나라 아고산지역의 귀한 활엽수, 거제수나무.
내가 거제수나무를 자작나무 앞에 적는 이유는 해가 묵을수록 노을빛 광채를 띠는, 한 겹 아래 가려진 수피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정한 속마음을 부끄러워 드러내지 못하고, 무뚝뚝한 표정의 백발 아버지 같은….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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