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핵화’여야 할 이유

한겨레 2023. 11. 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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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한국사회][한반도 평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19일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한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추진 탄도유도탄 잠수함(SSBN) 켄터키함(SSBN-737) 내부를 시찰하며 잠망경을 살펴보고 있다. 미 해군 제공

[똑똑! 한국사회] 방혜린|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지난 20일, 사장 교체를 시작으로 한창 혼란한 상황인 한국방송(KBS) 보도본부에서 기자들에게 ‘북미’ 표기를 ‘미북’으로,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당시 외신들 역시 ‘US-North Korea Summit’ 또는 ‘North Korea-US Summit’, 혹은 ‘Singapore Summit’ 등 다양하게 표기한 바 있으니, 이 문제는 한국방송이 공영성을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정하기 나름일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는 다르다. 이 표현은 1991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채택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을 냉전 종식 뒤의 국제질서와 비확산체제 규범으로 끌어들이면서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남북 최초의 합의된 핵군비통제 시도였다. 물론 이후 북한의 핵개발 행보가 이어지면서 이 선언은 유명무실해졌으나, 이후 북핵 폐기 시도는 모두 ‘한반도 비핵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미국 국무부 역시 북한 문제의 목표를 설명할 때 ‘Denuclearization of Korean Peninsula’라는, 한반도 비핵화를 영어로 직역한 표현을 최근까지도 사용했다.

그렇다면 한국방송은 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자제하라고 했을까? 이 문제를 다룬 기사를 통해선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추측하건대 윤석열 정부 들어 통일부가 발간한 ‘2023 통일백서’에서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한 의도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은 보수진영 일각의 ‘한국 핵무장’ 주장과 통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현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한국에 부합하지 않는 표현인데다, 나아가 한국의 핵무장을 제약해 북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니 ‘북한 비핵화’가 합당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금까지의 비핵화 시도가 모두 실패하였으니,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핵무기에는 더 많은 핵무기로 대응해야 한다는 ‘한국판 상호확증파괴전략(MAD)’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북한의 움직임을 수수방관하는 동안 문제는 커지고 결국엔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순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핵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상호확증파괴전략을 고려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핵비확산체제(NPT)를 벗어나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구상의 현실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핵은 핵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영역에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상호확증파괴전략을 선택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전면전만 발생하지 않았을 뿐, 두 나라가 개입된 국지적인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됐다. 핵무기가 안보 위협을 억제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핵보유국인 이스라엘이 아랍공화국연방에 기습공격을 당했던 욤 키푸르 전쟁 같은 반례가 있다. 또한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끝없는 핵무기 경쟁을 부른다는 점에서 상호확증파괴전략은 미친(mad) 전략으로도 불린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마치 우리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여도, 더 이상의 핵무기와 전쟁을 막기 위해선 한반도라는 지역 개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 구소련 해체 과정에서 있었던 핵 폐기, 유럽의 군비통제 노력은 결국 특정 국가를 지목해 이뤄낸 것이 아닌 지역 차원의 협력과 양보를 통해 얻어낸 결과였다. 연이어 일어나는 국제 안보위기 속 군비통제의 약속이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평화를 위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양보와 포기를 위한 노력으로 얻은 평화는 아직 겪어보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절멸을 위해 서로가 노력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는 70년 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단지 선언적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협력했던 결과물을 계속 남겨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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