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아무도 모르는 카르텔에 갇힌 韓 R&D 투자 철학
요즘 대덕연구단지 주요 거리에는 전에 없던 현수막들이 내걸려 있다.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안 철회를 촉구하는 현수막들이다. 지난 8월 말, 정부가 미래에 대한 투자를 실체도 모를 ‘카르텔’로 폄훼하며 단행한 국가 R&D 예산 삭감을 발표한 이후로 과학기술계는 물론 국가가 술렁이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책 기조 변화와 세수 부족 등의 이유로 다른 분야에 비해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 왔던 과학기술계이다. 그 덕분에 맷집을 키운 과학기술계이지만 성장 저해를 초래할 만큼의 감축 규모에 현장에서는 반발이 심하다.
삭감 배경은 그동안의 R&D 예산 급증 과정에서 발생한 비효율·낭비성 요인을 재정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과 비효율을 개선하겠다고 빼든 칼에 정작 휩쓸려 가는 건 현장의 연구자들이다. 내년도 R&D 예산 삭감으로 진행 중이던 연구에 차질이 생기는 한편 신규 과제 불발은 물론이고 9월부터 계약직 연구자들에게 권고사직이 통보되는 사례가 생겼다.
이번 삭감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 심화, 후속세대 양성 차질, 우수연구인력 이탈 및 고용불안, 과학기술 생태계 악화, 과학기술 성장 저해 등을 가져와 결국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처럼 R&D 예산은 단지 1년간 몇몇 연구기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국가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비효율적인 재정 운용을 초래하는 시스템 개선은 무시하고, 모호한 기준으로 일괄적인 예산 삭감을 단행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 분야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과학기술 핵심은 투자의 연속성과 지속성이다. 기술개발은 투자의 변동성이 커지게 되면 연구 흐름이 와해돼 기술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적해 놓은 기반 기술마저 소실된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회사가 어려워져도 오히려 연구개발에 집중 투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는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희망 없는 연구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커털린 커리코 교수는 mRNA 연구로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기초연구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없었다면 그가 코로나19 백신 기술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선진국 수준에 이른 우리나라가 과학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성을 토대로 트렌드에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R&D 분야의 특성을 반영해 전략적으로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정부 기조와 상관없이 장기적 안목이 중요한 기초연구와 정부가 주도하는 단기적 집중 전략이 필요한 국가전략기술연구로 나누어 효율적으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즉, 중장기 연구개발에 총예산의 80%를 배정하여 과학기술계 고유 운용 권한과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한편, 나머지 20%는 정부가 국가전략기술연구에 유연하게 운용하는 예산안을 제시한다.
지난 7월 발간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 혁신정책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연구 시스템은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장기적 영향력과 잠재력을 지닌 고위험·고성과 연구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개선이 필요하며 기존 범부처 조정 프로세스는 부처 간 자원 배분과 예산 경쟁을 관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 부담이 크다고 봤다. OECD조차 한국 R&D 연속성 확보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여전히 정부는 쉬운 결과를 내는 ‘뻔한’ R&D는 지양하자면서 정작 단기성과 평가를 강화해 예산을 배분하고 있다. 한술 더 떠 상대평가로 연구과제를 주기적으로 구조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R&D 투자에 대한 철학 부재는 연구 단절을 야기해 결국 한국 과학기술 생태계의 축적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답은 전략적 예산 배분을 포함한 R&D 투자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세워야 한다는 데 있다.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R&D 투자가 이뤄져야 국제사회에서 기술 패권자로 대한민국이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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