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바람 쌩생, 외투의 계절이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2023. 11. 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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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외투의 계절이 왔다. 요즘은 한국이 러시아보다 춥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만난 페테르부르크인도 서울 겨울이 뼛속을 파고들어 더 매섭다 했다.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 바람과 습기의 합성물인 이 추위가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파리, 런던, 베를린, 페테르부르크에도 있다. 보통은 이방인이 타향의 추위를 그렇게들 느끼고, 그래서 골병든다고들 말한다. 뼛속 깊은 추위란 다름 아닌 뼛속 깊은 외로움, 즉 상대적 소외감의 체감 온도다.

어떻든, 남극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는 러시아다. 그러나 길거리가 얼어붙었지, 건물 벽은 두툼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정비해놓은 도시 난방 시스템은 견실하며, 에너지 공급도 문제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추위 적응력이 뛰어나서, 기름진 음식, 독한 술, 뜨거운 수프와 차, 털외투, 털모자로 무장한 러시아인은, 추위에 관한 한 무적의 용사들 같다. 그곳에서 털외투는 실존 필수품이다. 서구풍 패션(패딩, 인조 모피 유행) 탓에 소비량이 대폭 줄었다지만, 겨울 러시아는 여전히 모피 전시장으로 돌변한다. 최고급 담비부터 여우, 토끼, 양, 멧돼지, 심지어 다람쥐까지, 경제력과 취향에 맞춰 한 벌씩은 갖춘 듯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털외투 없이는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뼛속 깊이 추울 수밖에.

19세기 작가 고골의 단편 ‘외투’는 바로 그런 내용이다. 쥐꼬리만 한 급료로 생계를 꾸려가는 모든 소시민의 ‘강력한 적’, 페테르부르크 겨울 이야기다. 관청에서 일하는 만년 9등관 관리가 새 외투를 마련한다. 너무 낡아 도저히 덧대 입을 수 없는 헌 외투 대신, 저녁까지 굶어가며 연봉의 3분의 1이 넘는 돈을 1년간 열심히 모은 끝에 새로 맞춘 옷이다. 자기 분수대로 고양이 털 깃을 달았지만 “멀리서 보면 담비로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새 외투는 그의 생애 최고·최초 사치품이며,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평소 그를 무시하고 핍박해 온 동료들은 농담 삼아 착복식 파티를 열어준다. 기쁨에 들뜬 그는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모임에서 생전 처음 샴페인까지 두 잔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면서는, 역시 생전 처음 아니었을까 싶은데, 갑자기 여자 뒤를 쫓기도 한다. 그런데 그 귀갓길의 인적 없는 광장에서, 그 소중한 외투를, 그만 강탈당하고 만다.

뒷이야기는 슬프고도 환상적이다. 새 외투를 잃은 것만으로도 혼이 빠진 데다가, 다음 날 도움을 청하러 간 ‘고위층 인사’에게 호된 모욕까지 당한 하급 관리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심한 고열과 헛소리 속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외투 털이 담비 아닌 고양이 것이었듯, 관 또한 비싼 참나무가 아니라 싸구려 소나무로 짜진다. 이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도시 각처에 유령이 출몰하여 “관등이고 계급이고 가리지 않고” 관리들 외투를 마구 낚아채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은 ‘고위층 인사’의 외투까지 빼앗은 다음에야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인위적이고 가장 환상적”이라 평한 도시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다. 계몽 군주 표트르 대제가 늪지대에 세운 이 기획 도시는 인간 의지로 자연을 제압해 창조해낸 위업이자, 러시아 제국의 탄생을 신호한 역사적 표적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농노와 죄수, 농민을 징집해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십 만 생명이 희생됐고, 그래서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도 일컫는다. 도시 외형은 물론 그 안의 인간 삶 역시 표트르 대제라는 한 위인의 구상과 비전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구획되고 통제되었다.

자연과 인간, 영웅과 소시민, 제국과 개인 삶이라는 자명한 길항의 인류사를 가장 통렬히 비틀어 풍자한 작가가 고골이다. “고골은 사람들을 슬픔과 연민의 눈물 속에서 웃게 만든다”고 푸시킨은 통찰했다. 문서 베껴 쓰는 일밖에 몰랐던 ‘작은 인간’의 부서진 꿈이 무척이나 가엾지만, 치질 환자의 얼굴색을 한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소개받는 순간 독자는 푸핫, 웃지 않을 수 없다. 유령의 등장이 괴괴하긴 해도, 근엄한 고관부터 말단직 관리까지 모두가 외투 없이 바들바들 떠는(그것도 관등 순으로 줄지어!) 광경을 떠올리면, 절로 폭소가 터져 나온다. 통쾌한 웃음이고 서글픈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 뒤편 어디에선가 고골의 마지막 호소가,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 부와 권세와 허영의 껍데기를 벗겨낸, 그것은 알몸의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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