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 자라는 결의…“무너진 다리 그대로 뒀다, 러 만행 잊지 않으려고”

부차·이르핀(우크라이나)/김신영 기자 2023. 11. 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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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부차·이르핀 현장 김신영 국제부장 르포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내에서 30분 정도를 차로 달리면 이웃 도시 부차에 도착한다. 일요일인 지난 26일 부차 시내에 있는 햄버거 체인 맥도널드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벼 선 채로 식사하는 이들도 많았다. 우크라이나 사진작가 올렉산드르 포펜코씨는 “여느 도시에 있을 법한 주말 식당의 분주한 이 풍경이 부차 시민에겐 당연한 일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은 대번에 수도 코앞인 부차를 점령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수복한 4월까지 민간인 약 500명이 러시아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 점령 당시 부차에 살았던 포펜코씨는 “아이들과 웃음소리가 가득한 맥도널드의 모습은 폐허가 됐던 부차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고, 우리 자신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고 했다. 완전히 파괴됐던 맥도널드는 지난해 12월 건물을 다시 세워 문을 열었다.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서쪽의 소도시 이르핀을 잇는 이르핀강 다리가 무너진 모습. 새 다리(왼쪽)는 잔해를 남겨둔 채 건설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수도 키이우 코앞까지 닥친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이르핀강의 다리를 폭파해 무너뜨렸다.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수도를 지켰지만, 약 300명의 피란민들이 빠져나오지 못해 러시아군에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이르핀을 점령한 20여 일 동안 주택 등 이르핀의 생활 시설 약 70%가 파괴됐다고 한다. /올렉산드르 포펜코

키이우 인근 옛 러시아 점령 지역에서 만난 주민들은 러시아군이 탱크를 몰고 들이닥쳤던 1년 9개월 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부서진 건물은 재건되고 일상도 많이 돌아왔지만 가족과 친구를 이유도 없이 러시아군의 총에 잃어야 했던 이들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모습이었다. 1991년 독립 전까지 구(舊) 소련 연방이었고 10년 전까지만 해도 친러 정권(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우크라이나 사회는 전쟁 이전에 친러·반러가 반목하며 대립해 왔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을 통해 겪은 러시아군의 잔혹함이 유럽연합(EU) 및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등 자유 진영 합류를 국민이 단합해 지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부차에 세워진 추모의 벽 - 2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의 소도시 부차의 성(聖) 안드레아교회 안드리 신부가 '추모의 벽' 앞에 서 있다. /김신영 기자

이날 부차에서 만난 성(聖)안드레아 교회 안드리 신부는 “러시아군은 우리 성당에도 작은 ‘선물’을 남겨두고 갔다”면서 총격으로 여기저기 구멍난 교회의 흰 외벽을 가리켰다. 안드리 신부는 러시아 점령 시기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고 뒷마당에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묘지 앞에 세운 추모의 벽에 적힌 이름은 500명으로, 30명의 유골은 아직 신원 확인을 하지 못했다.

지난해 2월 27일 벨라루스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러시아군은 무방비였던 부차를 점령하며 민가를 총과 폭탄으로 부수고 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했다. 러시아인들이 왜 그토록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러시아는 한 번도 민간인 살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속 판에 이름과 생몰(生沒) 날짜를 적은 추모의 벽 앞에서 안드리 신부는 “함께 사역하던 동료 신부도 집에서 러시아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군 점령 당시 러시아군이 쏜 포탄에 맞아 외벽이 손상된 키이우 인근 도시 부차의 성 안드레아 교회. /부차=김신영 기자

그러면서 그가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습과 여성과 어린이가 러시아군에 살해당한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이 찍힌 날짜는 ‘2022년 3월 22일’입니다. 데이터는 조작할 수 없지요.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이 모든 사진이 자기들이 4월에 물러나고서 우크라인들이 연기를 해서 만든 연출 사진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기적을 믿지만, 이런 (시간을 뒤바꾸는) 기적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픽=김현국

부차보다 키이우에 가까운 접경 도시 이르핀까지도 러시아군은 진격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이르핀과 키이우를 가르는 이르핀강의 다리를 파괴해 간신히 수도를 지켰다. 이르핀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군대가 절반씩 주둔하는 ‘회색 지대’였고, 빠져나오지 못한 민간인 중 약 300명이 러시아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국계 우크라이나 배우인 파샤 리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3월 6일, 차를 타고 가던 도중 러시아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즉사했다.

파샤 리가 탔던 차를 운전했던 타라스 멜니크씨는 러시아군이 총탄을 쏟아붓던 이르핀의 도로 앞에서 “당시 우리는 벙커에 있는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에게 식료품을 배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멜니크씨를 만난 26일 이르핀엔 눈이 내리고 추위가 매서웠지만 그는 “그날 그대로의 차림으로 비극을 설명하고 싶다”면서 점퍼만 걸친 차림으로 나왔다. “내가 운전 중이고 파샤는 뒷자리에 타고 있었습니다. 좌회전을 하자마자 총구를 겨눈 러시아인이 보여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러자 일부 총탄이 운전석을 지나 뒷자리의 파샤에게 맞았습니다. (후드티에 달린) 이 모자에 난 구멍은 총알이 스쳐간 흔적이지요. 저는 차를 버리고 기어서 도망쳤고 파샤의 시신을 수습하기까지, 여드레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멜니크씨는 크림반도 출신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도저히 러시아인으로는 살고 싶지 않아서” 키이우 위성도시인 이르핀으로 와 정착했다. 그로부터 8년 후, 이번엔 러시아의 기갑부대가 이르핀에 들이닥쳤다. 그는 “더는 (러시아인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망할 놈의 러시아인들이 싫어서 크림반도에서 900㎞나 떨어진 이곳으로 왔는데 그들은 또 제 앞에 있더군요. 이번에도 우리(우크라이나인)를 ‘해방’시켜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이젠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전쟁 발발 후 피란민에게 식료품을 배달하는 자원봉사에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의 문턱까지 갔고 친구를 잃어야 했지요.”

지난해 3월 러시아가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이르핀의 주민 타라스 멜티크씨. 그는 한국계 배우 파샤 리가 이 거리에서 러시아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운전석에 있었다. 러시아군이 쏜 총알이 스치며 만든 구멍이 후드티 모자 오른쪽에 남아 있다. /김신영 기자

이르핀에서 키이우로 돌아오는 길, 이르핀 다리를 건넜다. 우크라이나군이 부차·이르핀을 수복한 후 새로 건설한 다리다. 그 옆엔 당시에 파괴돼 강에 푹 처박힌 옛 다리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군이 수도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국가 상실의 위기, 그 과정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전체주의 국가 러시아의 잔인함을 잊지 말자는 결의가 이 무너진 다리엔 담겼다. 안드리 신부는 “성직자로서 러시아인을 언젠가는 용서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성경엔 이렇게 쓰여 있지요. ‘회개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러시아군은 부차에서 저지른 일을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수로 그들을 용서하겠습니까.”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심부에 있는 김신영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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