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기억상실과 평화의 논리
현재의 사실에서 출발하자.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지난 22일 팔레스타인 사망자를 약 1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사망자 중 열에 일곱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이다. 물론 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며 사상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삶의 터전을 파괴당하고 기본적인 의료적 조치와 생필품 공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16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것을 학살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팩트’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이런 사실의 나열마저 거부한다.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가 이스라엘인 사망자의 10배를 넘는다는 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대응은 정당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현재 벌어지는 학살을 설명할 ‘서사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서사의 시작은 10월7일 하마스의 공격이다. 그 서사는 이스라엘을 정당한 피해자로만 본다. 하지만 다른 서사도 있다. 지금의 사태를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문제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학살을 지지 또는 묵인하는 한국 사람들 일부다. 정확히는 그들의 ‘기억상실증’이 놀랍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 식민지배를 겪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서사 역시 헌법을 통해 1910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잡고 있다. 지금도 식민지배의 유산이 한·일관계에서 잔존하는 마당에, 이스라엘의 오랜 식민지배 문제는 왜 서사에서 누락시키는가? 탈식민 국가 중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해 드문 성취를 이루었다는 ‘국뽕’이 급기야 식민지배의 역사를 망각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렇게 과거 식민지배를 겪었던 나라들 다수는 10월27일 이스라엘의 적대 행위 중단과 휴전을 요구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에 찬성했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기권을 던졌다.
분단국가 대한민국은 전쟁과 학살을 겪었다. 그래서 혹자는 하마스를 북한으로, 이스라엘을 남한으로 동일시하며 북한의 도발에 강력 응징을 주장한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고통받는 상황마저도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는 데 활용하는 그 나르시시즘이 놀랍긴 하다. 무엇보다 그 논리는 전쟁이 일어나도 안전한 곳에 있을 권력자들의 것이다. 전시에 징집되어 총을 들거나 떨어지는 포탄에 속수무책일 ‘평범한 시민’의 것은 아니다. 시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에서 승자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승자는 있다. 그것은 전쟁을 주도하고 명령을 내리는 권력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명령을 받는 쪽에 있는 이들, 병사나 민간인들에게 전쟁이란 패배라는 결론이 정해진 각본이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떠올려 본다면, 결국 전쟁은 이념과 출신을 떠나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북한의 침공에 의한 고통만큼, 남한 정부도 자국의 시민을 구해주기는커녕 학살했다. 제주 4·3에서 시작해 보도연맹, 부역자 처벌, 국민방위군, 폭격…. 그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은 전쟁을 부르는 권력자의 논리가 결코 시민을 위한 ‘평화의 논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미디어가 쏟아내는 기사들은 대개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 권력자들, 무기산업이 주장하는 ‘전쟁의 논리’를 답습한다. 거기엔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민간인들의 시선이 배제돼 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식민지배, 전쟁, 학살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동반한 채로. 이에 휩쓸리지 않고 ‘기억과 평화의 논리’를 지켜나가는 것만이 ‘전쟁의 패자’가 되지 않을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이 말하는 평화의 논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감동하던 내 팔레스타인 친구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한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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