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람의 마을서 제 이름 지킨 고욤나무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제 존재감을 내려놓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의 나무가 있다. 고욤나무다. 고욤나무도 분명히 감을 닮은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크기가 작은 데다 떫은맛이 커서 환영받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감나무를 키우려면 고욤나무가 필요하다. 씨앗으로 키우면 튼실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감나무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접붙여 키워야 맛난 감을 맺는다. 고욤나무는 결국 감나무를 사람에게 환영받는 나무로 키워내는 뿌리이자 바탕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감나무 그늘에 묻히는 바람에 제 이름을 내려놓고 그저 감나무로 불리게 마련이다.
까닭에 크고 오래된 고욤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고욤나무도 2010년에 지정한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가 유일하다.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는 이례적으로 고욤나무로서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특별한 나무다. 나무높이가 18m에 이르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도 3m에 가깝다. 10m 넘게 자란 나무를 보기 어려운 대개의 고욤나무를 생각하면 매우 큰 나무다. 게다가 사람 키 높이쯤에서 여섯 개의 굵은 가지로 나뉘며 펼친 나뭇가지의 품은 사방으로 고르게 22m나 된다. 여간 아름답고 장한 생김새가 아니다.
경주김씨 집성촌인 보은 용곡리 우래실 마을의 뒷동산에 서 있는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는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올린 당산제를 받으며 지난 250년 동안 사람살이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나무였다. 오래도록 당산나무로 여겨왔다는 증거로 나무 앞에는 이끼 오른 돌무지가 다소곳이 세월의 흐름을 지키고 있다. 세월 지나며 마을 당산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무속인들이 찾아와 굿을 올리는 신목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자잘한 열매를 맺으며 감나무 대목으로 쓰이며 존재감을 잃어온 여느 고욤나무와 달리 스스로의 이름을 올곧이 지키며 살아온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는 매우 특별한 나무다. 여느 큰 나무보다 더 오래 지켜야 할 희귀한 자연유산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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