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34>] 북미 대륙이 1원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된 이유
영어에는 ‘콘티넨털만큼의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는 관용어가 있다. 여기서 콘티넨털은 북미 대륙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말은 ‘일 원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링컨 콘티넨털은 193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럭셔리 카의 대명사고, 인터 콘티넨털 호텔은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럭셔리 호텔의 대명사다. 어쩌다 콘티넨털이 1원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된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위대한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긴 시간(longue dureé)’을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
참을 수 없는 법
오늘날 미국 공화당 내부에서 가장 보수적인 파벌을 ‘티파티’라고 부른다. 하지만 원래 티파티는 식민지 시절 영국의 탄압에 항거하던 북미 급진파의 배척 운동을 가리킨다. 1773년 영국의 지나친 간섭에 격분한 보스턴의 급진파가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항구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습격하여 차(茶) 상자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Boston Tea Party). 이에 격분한 영국 정부는 1774년 식민지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 일련의 징벌적인 법률을 만들어 시행했다.
영국인은 이 법을 두고 강압적인 법(coercive Acts)이라고 불렀고, 식민지인은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고 불렀다. 대상이 동일하더라도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이제 식민지 의회와 주지사를 영국 국왕이 임명하게 되었다. 게다가 타운홀 미팅도 주지사가 요청하는 경우에만 열 수 있게 됐다. 여기서 타운홀은 서울시청처럼 거창한 석조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의자 몇 개 갖다 놓고 중요한 시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자리를 말한다.
요즘 들어 국내 정부 기관들이 타운홀 미팅을 유행처럼 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타운홀 미팅은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평등과 자치를 필요로 한다. 수직적 위계 조직의 구성원이 둥글게 둘러앉는다고 해서 타운홀 미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영국 정부는 피고인들을 보스턴이 아닌 런던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증거가 모두 보스턴에 있는 상황에서 런던에서 재판받아야 하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이 법을 두고 살인법이라고 불렀다. 이외에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영국 군인에 대한 숙소 제공 의무를 부과했다.
콘티넨털의 유래
이러한 조치는 13개 식민지 전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774년 본국에 대한 항의를 조율하기 위해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조직됐다.
하지만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775년 결국 전쟁이 터져 버렸고, 1776년 대륙회의는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게 됐다. 전쟁은 벤처 사업 같아서 고도의 불확실성과 경제적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충분한 자금이 필요하다. 식민지의 경우 강인한 의지는 넘쳐났지만, 총과 군복을 살 돈이 없었다. 당시에는 금은이 돈이었는데 식민지에는 금은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묘안을 생각해 냈다. 1775년 대륙회의는 혁명전쟁의 자금 조달을 위해 200만스페인달러 상당의 콘티넨털(Continental)을 발행하기로 했다.
콘티넨털은 신용어음(bill of credit)으로서 ‘미래의 약정된 기일에 액면가에 해당하는 은화를 지불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채무 증서를 말한다.
콘티넨털의 액면가는 1/6달러에서 80달러까지 매우 다양했으며 이상한 단위도 많이 포함돼 있었다. 1/3달러짜리 콘티넨털의 경우 지폐의 앞면에는 해시계 도형이 그려 있고 그 옆에 ‘자신의 일에 전념하라(Mind Our Business)’는 경구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이 어음은 소지인에게 스페인 1/3달러 또는 그와 동등한 가치의 금 또는 은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라는 문구가 인쇄돼 있다.
너나 잘하세요(Mind Your Own Business)
북미 혁명가들은 혁명 기간 콘티넨털을 지속적으로 발행하여 결국 2억5000만스페인달러 상당의 지폐를 남발하게 된다. 1778년 말까지 콘티넨털 가치는 액면가의 5분의 1에서 7분의 1을 유지하다가, 1780년는 액면가의 40분의 1로 떨어졌다. 1781년 전쟁이 끝날 무렵 콘티넨털의 실질 가치는 명목 가치의 100분의 1로 떨어졌고 나중에는 1000 대 1로 떨어지더니 유통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콘티넨털은 전쟁 중에 심하게 평가절하되어 ‘미국처럼 가치가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는 유명한 문구를 탄생시켰다. 또한 콘티넨털의 앞면에 쓰여있던 ‘자신의 일에 전념하라’는 문구는 ‘본인의 일이나 잘해라’로 변질돼 버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 “너나 잘하세요”는 영어 ‘Mind Your Own Business’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화폐적 해프닝이 벌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대륙회의는 오늘날 연방의회와 달리 과세권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은 13개 식민지의 자발적인 지원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일부 학자는 반란군 지폐가 평가절하된 이유를 대륙회의에 대한 신뢰가 저하됐다거나 반란군 지폐를 뒷받침할 유형자산(금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다수의 학자는 지폐를 너무 많이 발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영국이 콘티넨털을 대규모로 위조해 경제 전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영국인이 고용한 예술가들은 너무나 뛰어나서 이들이 위조한 지폐는 순식간에 식민지인을 매혹시켰다.
뉴욕에 자리 잡은 영국군 사령부는 엄청난 수량의 위조화폐를 발행했고 이를 통해 현지의 전쟁 물자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모든 식민지 주민 사이에 위조지폐를 유포시켰다. 게다가 13개 식민지가 독자적으로 신용어음을 대량으로 발행했기 때문에 화폐적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륙 통화 1달러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32실링에 거래된 반면, 조지아에서는 5실링에 거래되기도 했다.
헌법에 화폐를 담다
물론 대륙 통화는 혁명 정부의 전쟁 자금 조달에는 큰 가치가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통화가치 하락이 사실상 전쟁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세금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inflation tax). 결국 콘티넨털은 미국 헌법이 비준된 이후인 1790년대에 들어서 액면가의 1%로 국채와 교환될 수 있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대륙 달러의 붕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미국 제헌회의는 헌법에 화폐에 대한 내용을 담게 됐다.
오늘날 미국 헌법 제1조에는 ‘연방의회만이 화폐를 주조하고 … 각 주는 화폐를 주조해서는 안 되며, 신용어음을 발행해서도 안 된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연방헌법의 수권에 따라 1792년 주화법이 제정됐고, 이에 따라 조폐국이 설립되고 달러가 회계 단위로 정해졌다.
초기의 달러는 금과 은을 기준으로 정의됐는데(복본위제), 1달러를 100센트로 나눔에 따라 세계 최초의 십진법 통화가 됐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화폐단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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