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3>] 결말부터 썼을 것 같은 소설을 만날 때

박혜진 문학평론가 2023. 11. 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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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이따금 결말부터 썼을 것 같은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물론 그 소설이 결말부터 쓰였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떤 소설의 결말에 대해 품게 되는 내 심증도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닌데, 그런 소설들에는 다른 소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반복이다. 이때 반복은 강조를 위한 형식적 되풀이가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의미론적 되풀이다. 소설은 변화를 통해 말한다. 변화야말로 소설을 이야기와 구분되게 만드는 플롯의 핵심이다. 그런데 소설에 있음 직한 변화를 거부하는 되풀이로 결말을 대신한다는 건 애초에 그 소설이 변화와 대척점에 있는 고정된 태도에 대해 말하려 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결말 자체가 메시지이므로, 우리는 그런 소설을 읽을 때 결말부터 쓰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하나코는 없다’는 결말부터 쓰였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소설은 하나코의 부재를 증명한다.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없음’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다. 작가는 하나코의 부재를 증명함으로써 하나코의 왜곡된 ‘있음’과 그런 잘못된 ‘있음’을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데 소설의 마지막을 할애한다.

소설의 엔딩은 하나코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다. 그들의 시선은 한때 하나코를 향했던 시선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코를 향한 ‘얼평(얼굴 평가)’으로 일관된 마지막 문장이 그들의 고정화된 시선을 보여 준다. 그들에게 하나코는 초지일관 코가 예쁜 여자였던 것이다.

서른두 살, 무역 회사 간부인 ‘나’는 출장을 핑계 삼아 방문한 베네치아에서 대학 시절 만난 하나코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코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합석해 모든 남자의 호감을 샀던 여자다. 본명이 정진자인 그녀는 유달리 코가 예뻐 ‘하나코’라 불렸다.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진심을 다해 그들과 만나 줬던 그녀에게 연심을 품은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코를 향한 남성들의 관심은 피상적 이해와 이중적 태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코를 추앙하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은밀하고 대상화된 존재로 그녀를 폄훼한다. 여행지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남자들이 하나코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후 하나코는 종적을 감춘다. 한편 베네치아에서 하나코의 소식을 듣게 된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던 마음을 접고 다만 환상 속에 그녀를 간직하기로 한다. 하나코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이탈리아 홍보 잡지에서다. 잡지에서 하나코는 의자 디자인만을 고집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작가가 하나코의 부재를 통해 하나코의 왜곡된 존재를 증명하고 나아가 그런 하나코를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방식은 세 번의 반전을 통해 이뤄진다. 첫째, 제목이다. 하나코는 ‘없다’. 이것은 소설의 표면 서사와 상반된다. ‘나’와 친구들에게 하나코는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기억의 불온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기록의 등장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하나코를 잡지 인터뷰 기사를 통해 만난다. 하나코를 향한 그들의 불분명하고 편향적인 기억이 간과해 왔던 그녀의 공적 모습을 통해 그들의 하나코가 그들만의 하나코였을 뿐, ‘그런’ 하나코는 현실에 없었음이 암시된다.

마지막으로 셋째, 반전 없는 반전, 요컨대 그들의 나쁜 일관성이다. 그들의 죄는 그녀를 왜곡 속에 가둔 것만이 아니라 끝내 변하지 않은 태도에 있다. 코가 예뻐 하나코라 불렸던 정진자는 하나코의 부재가 증명된 이후에도 ‘나’에 의해 코가 예쁜 하나코로 인식된다. 공적 모습의 정진자를 본 뒤 사적 모습의 하나코를 떠올리는 태도에서 작가가 환멸을 느꼈던 대상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볼 뿐 아니라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을 때조차 진실에 무감각하다. 그들에겐 진실의 능력이 없다.

‘하나코는 없다’는 1994년에 발표된 소설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왜곡된 인식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문제는 오히려 여성에게 국한되지 않은 채 모두에게로 확산되어 있는 것 같다. 집단과 개인이 타인을 자신의 시선 속에 고정할 때 고정된 이미지는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고정된 시선과 존재의 죽음이 더해질 때 타인은 박제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박제하고 있지 않는가. 불현듯 결말부터 썼을 것 같은 이 오래된 소설이 무겁고 무섭게 와 닿는다.

Plus Point
최윤

사진 조선일보 DB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국문학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78년 프랑스 프로방스대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문학사상’에 평론을 발표했고 1988년 ‘문학과 사회’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동인문학상을,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이상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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