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vs 복고풍, 누가 더 촌스럽나요
인천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는 한국 근대사가 시작된 19세기 말~20세기 초 모습을 130여 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해 외세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다. 그로 인해 인천항(제물포)에는 한국 근대화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외세가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이곳을 개발하면서 외국 상인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다른 나라의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을 적용받지 않는 국제법에서의 권리) 지역이 생겨났다. 지난 10월25일 개항장 문화지구를 찾아 이용 설명문이나 안내문에 어렵고 낯선 표현이 있는지 살펴봤다.
먼저 짜장면박물관을 나와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이라고 쓰인 비석을 볼 수 있다. 이 계단을 등지고 오른쪽이 청나라 거주지, 왼쪽이 일본 거주지다. 계단을 따라 올라서 인천항을 내려다보면 치열하게 전개된 열강들의 다툼과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받으며 살았을 백성들의 아픔이 전해진다.
조계지 등 낯선 용어엔 설명글 필요
여기에서 조계지(租界地)란 개항도시에 자리 잡은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며 이곳에 머문 외국인은 행정권·경찰권을 포함해 치외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결과로 빚어진 것으로서 한국에서는 조계나 조계지, 일본에서는 거류지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이 많이 찾는 공간인 만큼 조계지에 대한 설명 팻말을 걸어두면 어떨까?
청·일 조계지 경계석 위에 자리한 자유공원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홍예문’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해 1908년 완성한 석문이다. 홍예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처럼 둥글다. 그래서 한자의 무지개 ‘홍(虹)’ 자와 무지개 ‘예(霓)’ 자를 써서 홍예문, 또는 무지개 문이라고 불린다.
홍예문에서 다시 자유공원 쪽으로 방향을 틀면 19세기 후반 개항장 일대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인이 사용한 고급 사교 클럽인 ‘제물포구락부’가 있다. 구락부(俱樂部)는 지금은 생소한 말이지만 1970년대까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자주 등장했다. 구락부는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영어 클럽(Club)을 일본어로 음역(한자음으로 외국어의 음을 나타내는 일)한 단어 ‘구라부(クラブ)’를 다시 한자 ‘구락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구락부는 취미나 친목, 오락 따위의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을 의미하는 말로, 국립국어원은 ‘단체’ 또는 ‘클럽’을 순화어로 제시했다. 우리말로는 ‘동아리’ 정도가 어울리겠다.
김형주 교수(상명대 국어문화원)는 “‘제물포구락부는 ‘제물포클럽’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초기 순화어 사업은 외래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일에 무게를 뒀다면 요즘 순화어 정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는 일에 무게를 두고 있다. 소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제물포구락부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19세기 레트로 즉석카메라로 레트로 추억을 담아드립니다’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레트로(retro)는 과거의 정치·사상·제도·풍습 따위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 하려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레트로 대신 ‘복고풍’이라고 쓰기를 권한다. 2020년 한글문화연대가 실시한 공공언어 적합도 조사에서도 레트로를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의견이 54.4%로 ‘외국어로 써야 한다’(16.7%), ‘상관없다’(28.9%)를 월등히 앞섰다.
공공현장서 바른 우리말 쓰기의 중요성
제물포구락부를 나와 일본 조계지로 들어서면 ‘은행거리’를 만날 수 있다. 이 거리에는 옛 ‘일본제1은행’ ‘일본18은행’ ‘일본58은행’이 줄지어 있다. 일본제1은행 건물은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재개관해 개항장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또 일본18은행 건물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재개관해 이 일대 근대건축물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어 청소년들의 역사·문화 교육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소실된 외국인의 주택’을 살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실(消失)이라고 하면 ‘사라져 없어짐. 또는 그렇게 잃어버림’이라는 뜻으로 여기기 쉽지만 여기서 말하는 소실(燒失)은 ‘불에 타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한자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도 많이 찾는 공간인 만큼 ‘불에 타 없어진’이나 ‘화재로 없어진’이라고 조금 더 쉬운 말로 써주면 좋겠다.
지난 6월부터 12회에 걸쳐 ‘쉬운 우리말 쓰기’를 연재하며 생태공원, 체험관, 전시관, 박물관 등 청소년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글을 통해 외국어나 일본식 한자표기, 어려운 용어 등을 쉬운 우리말로 대체하고 공공언어에서 바른 우리말 쓰기가 왜 중요한지 알아봤다. 공공현장에서 접하는 안내문과 설명문은 학생들에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 학생들이 말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끝>
글·사진 나윤정 객원기자
감수: 김형주 상명대 국어문화원 교수
공동기획: 한겨레신문사 (사)국어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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