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재명, 선거법 담판에 한국 정치 미래 달렸다 [성한용 칼럼]
성한용|정치부 선임기자
1988년 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소선거구제에 합의했다. 국회에서 선거법 협상을 했지만 부재자 투표 개표와 전국구 배분 방식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민정당 소속 장성만 부의장이 선거법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그 뒤 국회의원 선거 제도의 큰 틀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도입한 1인 2표제,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공수처법과 묶어서 처리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정도가 예외였다.
선거 제도를 바꾸기 어려운 이유는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이른바 제왕적 총재였다. 국회의원 공천권과 정치자금 배분권을 가진 정당의 ‘오너’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왕적 총재가 사라졌다. 제왕적 총재 시대의 장점이었던 협상 테이블도 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17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에게 제도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 시기에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 등 제대로 된 정치 개혁을 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2022년 대선 이후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에, 이재명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두 사람의 독특한 리더십과 정치 양극화로 인한 팬덤의 지지가 결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선거법 개정을 ‘남의 일’처럼 취급하고 있다. 왜 그럴까?
윤석열 대통령은 김기현 대표를 비롯해 국민의힘 정치인들과 통화나 식사를 자주 한다. 그런데도 공식적으로는 국민의힘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세한다. 이중적인 처신의 이면에는 사연이 있다.
2018년 2월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친박 인사들을 당선 가능성이 큰 서울 강남 3구와 대구 지역에 공천하기 위해 총 120번의 여론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당에 전달했다”며 공직선거법 57조의 6(공무원 등의 당내 경선 운동 금지)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휘둘렀던 칼이 이제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다. 국민의힘 경선에 개입하면 대통령 퇴임 이후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총선 개입이나 당무 개입으로 비칠 수 있는 언행을 극도로 자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재명 대표는 2022년 대선 공식 선거운동 하루 전인 2월14일 서울 명동에서 ‘위기극복·국민통합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적대적 공생이라 불러 마땅한 거대양당 체제 속에서 우리 민주당이 누려온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 개혁, 비례대표 확대,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금지 등을 약속했다. 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피해를 본 정당들에 거듭 사과도 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고, 위성정당 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 당 안팎에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자칫하면 1당을 빼앗길 수 있다”는 현실론 때문이다.
사정은 다르지만, 선거법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소극적인 태도는 비겁한 것이다. 선거 제도는 민주주의의 기본 틀에 해당하는 의제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결할 수 있다. 의원들에게만 맡겨서는 협상이 진척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결단해야 한다. 두 사람의 담판으로 선거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완성된 법률안을 만들 필요도 없다. 정치 양극화를 해소하고, 비례성을 높이고, 지방 소멸을 막는 정도의 원칙에 합의하면 된다. 나머지는 국회에서 의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두 사람의 어깨에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가 달렸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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