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부터 받고 쓸 곳은 나중에 찾는 ‘글로벌 R&D 예산’…“선후 바뀐 일처리” 비판

이정호 기자 2023. 11. 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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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조8000억원…올해보다 3배 증가
예산 소화할 해외 파트너 섭외는 미진
과기정통부, 협력 예산 이월 근거 마련
과학계 “예산 다 못 쓸 상황 대비 안전장치”
자료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가운데 국제협력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해당 예산은 올해의 3배가 넘는 1조8000억원으로 잡혔지만, 정작 어느 국가와 무슨 연구를 할지가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국제협력 R&D는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초부터 각별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추진을 강조해 온 분야다. 이와 관련해 R&D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7일 국제협력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발표했지만, 예산부터 일단 받고 협력 파트너가 될 해외 연구단은 나중에서야 찾는, “선후가 바뀐 예산 배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혁신방안 및 글로벌 R&D 추진 전략 주요 내용’이라는 주제의 언론 대상 브리핑을 열었다.

과기정통부 발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제 R&D 협력에 대한 복안이다. 이 장관은 “정부 전체 R&D에서 국제협력 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의 1.6%에서 향후 6~7% 수준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협력 R&D 투자 규모를 향후 3년간 총 ‘5조4000억원+α’ 이상으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정부는 내년 국제협력 R&D 예산을 올해(5000억원)보다 3배 이상 늘린 1조8000억원으로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다. 내년 정부 전체 R&D 예산이 올해보다 16.6%(5조2000억원)나 줄어든 상황에서 이례적인 대폭 증액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계에서는 국제협력 R&D가 뚜렷한 청사진 없이 너무 급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어확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공동대표(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는 “연구 현장에서 특정 과제의 탐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면 예산안을 만들어 정부에 제기하고 그 뒤 예산이 정리되면 국회가 검토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산 배정 절차”라며 “연구 현장과 상황 공유가 안 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국제협력 예산은 일의 선후가 바뀐 일이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협력 R&D 예산이 내년에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윤 대통령의 관심과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과학계는 본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며 동시에 국제 연구 협력을 강조하라고 지시했다.

재정전략회의에 앞선 지난 4월 미국 방문에서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경제 분야에서 ‘전략적 동맹관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하면서 기술 혁신을 위한 상호 협력을 강조했다. 특히 한·미는 양자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협력하기로 하면서 한국이 향후 ‘양자과학기술 선도국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 국제협력 R&D 예산 확대도 그 연장선으로 보인다.

이달 영국 방문에서도 윤 대통령은 한국과 영국 과학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을 글로벌 과학기술 허브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브리핑 자료를 통해 내년에 양자와 자율주행, 첨단 항공, 차세대 통신 등에서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세계 유수 연구기관과 협력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는 사실상 한국 정부의 ‘희망 사항’에 가깝다. 올해부터 추진 중인 첨단바이오 분야 외에 다른 국제협력 R&D에서는 파트너가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미처 국제협력 R&D 용처도 마련돼 있지 않은데, 예산부터 덜컥 받은 상황이 됐다는 시각이 과학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과기정통부가 이날 브리핑에서 ‘사업 집행의 회계연도 이월을 허용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도 주목된다. 내년에 다 쓰지 못한 국제협력 R&D 예산은 내후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장관은 브리핑에서 “각국의 회계연도 기준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말했다.

이 공동대표는 “(예산 이월은) 내년 예산이 급하게 만들어져 이것이 잘 집행될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며 “일종의 안전장치를 두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평가했다.

국제협력이 생각보다 까다로운 국가 간 조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명호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정책위원장은 “국제협력 R&D의 경우 ‘상호 윈윈’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며 “한국이 원하는 기술을 가진 국가는 한국을 잠재적인 경쟁 상대로 보고 협력을 꺼리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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