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돋보기]㉔기초단계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정부의 지원과 후원이 필요한 이유

이종현 기자 2023. 11. 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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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원 미만 신규 과제 사라진 개인기초연구사업
포닥·지역 신진 교수 지원 받기 힘들어져
교육부 개인기초연구 사업은 존폐 위기까지

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2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정부의 R&D 예산삭감 규탄 및 원상회복 촉구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뉴스1
기초연구 지원 시스템은 과학자들과 소통을 하면서 진화했다. 지난 20년 동안 현장과의 소통을 통해 분야별로 단계별로 적당한 연구비를 줄 수 있는 체제를 갖춰놓은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잘 짜여진 시스템인데, 이걸 갑자기 무너뜨리고 있다. 이걸 무너뜨리는 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전혀 모르겠다. 너무나 후진적인 발상이다.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대해 현장의 연구자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하고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뭘까. 열이면 열, 입을 모아서 이야기하는 건 기초연구의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개인기초연구사업이 대표적이다. 개인기초연구사업은 개인단위의 연구지원을 통해 기초연구 능력을 키우고, 연구자가 초기부터 생애 전주기동안 연구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1986년 시작된 대표적인 기초연구지원사업으로 과기정통부와 교육부가 각각 담당하고 있다.

이 사업이 어떻게 됐길래 연구자들이 기초연구 생태계가 무너졌다고 걱정하는 걸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개인기초연구사업의 내년도 예산은 1조6363억4700만원으로 올해보다 0.02% 줄었다. 규모만 보면 올해와 내년이 다를 게 없다. 전체 예산이 16.6% 삭감되는 와중에 선방했다는 말이 나옴직 하다.

하지만 사업 내역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개인기초연구사업은 수천만원의 소액 연구 과제부터 7억원 이상의 연구비가 지원되는 우수연구과제까지 여러 단계로 구성돼 있다. 연구자가 신진-중견-리더 연구자로 발전하는 단계에 맞춰서 과제를 받을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성장 사다리”라는 표현도 쓴다.

그런데 내년 사업 내역을 보면 1억원 미만 연구과제의 신규 사업이 전무하다. 특히 비전임연구자를 지원하던 창의도전사업의 신규지원이 아예 중단된다.

천승현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이 예산안이 확정되면 내년부터 포닥이 지원할 사업이 없어지고 지역의 교수들이 새로 받을 수 있는 사업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라며 “개인기초연구사업은 단계별로 연구자들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촘촘하게 만들어놓은 구조인데 정부의 R&D 예산안은 이걸 깨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30개 기초학문 관련 학회와 협의회가 모인 기초연구연합의 설명을 들어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개인기초연구사업의 경우 우수신진과 중견 연구자에 대한 신규 지원을 확대했다. 그러면서 “보편성 유형인 기본연구, 생애 첫 연구는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수월성 중심의 우수연구와 젊은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얼핏 보면 우수신진과 중견 연구자에 대한 지원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전임연구자의 창의도전사업이나 신진연구자의 생애첫연구, 기본연구 같은 기존에 있던 사업을 없앤 덕분에 다른 과제에 예산을 늘린 것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인데, 문제는 아랫돌을 빼면 연구자들이 성장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사다리는 그대로인데 사다리의 아랫부분에 발을 디딜 발판이 없는 셈이다.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따른 기초연구사업 구성 변화. 연구자의 성장 수준에 따라 촘촘하게 짜여져 있던 지원 사업에 듬성듬성 빈 자리가 생기게 됐다./기초연구연합

과학기술인들의 모임인 ‘공공을 위한 과학기술인 포럼(FOSEP)’의 이홍식 연구국장은 “생애첫연구나 기본연구의 신규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건 한 해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미래 학문후속에 지속적으로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며 “기초연구 단계에서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정부의 지원과 후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부의 개인기초연구사업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개인기초연구사업의 내년 예산은 23억9800만원으로 올해(93억2100만원)보다 74.3%가 삭감됐다. 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교육부 예산을 기초연구는 R&D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읽힌다”며 “과기정통부의 연구 과제는 수월성을 추구하고 교육부의 연구 과제는 균형발전을 추구한다는 게 R&D 지원의 양대 축이었는데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그 양대 축이 붕괴됐다”고 지적했다.

대안은 없을까. 천승현 교수는 매년 기초연구에 일정 규모의 예산을 증액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은 메르켈 총리가 취임한 2005년부터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4대 연구협회와 독일연구재단에 매년 꾸준하게 예산을 늘려오고 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는 매년 5%, 2015년부터 2030년까지는 매년 3%의 투자를 증액하는 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 천 교수는 “R&D 투자는 한국처럼 역주행하는 것도 안 되지만, 갑자기 많은 규모를 늘리는 것도 부작용이 생긴다”며 “한국도 기초연구비는 기금으로 지정해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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