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토론 반복한 노무현 지역균형발전론…175개 기관 분산 ‘대역사’
한국은 모든 게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지방은 피폐하다. 일본, 프랑스가 수도권 집중이 심하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비교도 안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지방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대통령 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발족해 2003년 4월24일(목) 오전 첫 회의가 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부터 위원회에 힘을 실어주었다. “경쟁력, 과학기술, 국가혁신이 모두 이 위원회 안에 있다. 한국은 수도권 집중이 지나치게 심한 나라다. 앞으로 분권과 균형발전으로 가야 한다. 나라의 운명이 여러분 손에 달려 있다.”
이어서 윤정로 교수(카이스트)가 주제발표를 하면서 지역혁신협의회의 모범 사례로서 대구, 충남테크노파크 경험을 소개했다. 김민남 교수(동아대)가 “지역혁신을 위해서는 대학 혁신이 전제인데 지금 지방대학은 고사 직전 상황이다. 지방대학에 연구비 지원을 늘리되 지방 할당제가 필요하고, 국립대는 기초학문, 사립대는 응용학문 중심으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흥순 벤처기업협회장은 “시장에 맡겨서는 실패할 분야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벤처기업 중 대학에서 탄생하는 비율이 16%다. 기업생태계를 생성시켜야 한다. 연구비 지방 할당제는 무리다”고 말했다.
성경륭 위원장이 “균형발전위원회, 부처 추진팀, 지자체 추진팀 3각 동맹이 잘 협조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유 과학기술보좌관은 “한국 연구개발(R&D) 예산이 일본의 13분의 1, 미국의 24분의 1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이공계는 능력 위주로 선택과 집중이, 인문사회계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세계 각국 혁신클러스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던 정태인 동북아경제중심위원회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혁신클러스터 기반 발전 개념이 중요하다. 상향식 발전이 이뤄져야 하는데 대덕단지는 시스템 조직가가 없고, 대기업이 유치되지 않아 실패했다. 중앙공무원들이 지방에 내려가야 하고, 주민 참여와 협조가 필요하다.” 이정식 위원은 영국의 쇠락하던 철강도시 셰필드가 1992년 셰필드대학 지역사무소를 설치, 산학연관 네트워크를 통해 학생들 취업을 돕고 공대, 의대 연구비를 조달한 성공사례를 소개했다. 송인성 위원은 10년 전 광주의 산학관연주(産學官硏住) 실험을 소개했다. 기업이 없어 결국 유흥, 주거지로 변모하며 실패로 끝나, 강남의 유자가 강북의 탱자가 되어버린 사례라고 말했다.
6월12일(목) 윤덕홍, 윤진식, 권기홍, 최종찬, 박호군, 박봉흠 장관, 성경륭 위원장, 김태유 과기보좌관과 함께 대구 테크노파크에서 열린 균형발전위원회 지방화 전략회의에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의 내용에 크게 만족해했고, 오찬 때 웅변조의 연설로 큰 박수를 받았다. 대구·경북지역에 산재병원 건립이 필요하다는 김경조 한국노총 대구경북본부장의 건의에 노 대통령이 바로 수락했다. 옆에 앉은 권기홍 노동부장관이 “그건 내 소관인데….”라고 해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6월26일(목) 오전 재정분권을 주제로 정부혁신위와 균형발전위 연석회의가 열렸다. 지방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의견 개진이 있었다.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지방소득세, 지방법인세, 지방부가가치세를 국세청이 걷어 지방에 주자”고 말했다. 독일의 공동세와 비슷한 아이디어였다. 남해군수를 역임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은 효율적, 지방은 비효율적이라는 가정 자체가 틀렸다. 교부세 같은 것을 통해 지방재정의 순증가가 있어야 한다. 지방에 몽땅 넘겨준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기우 교수는 “한국의 지방 재정자립도는 17%이므로 한국은 17% 지방자치 국가다. 1991년 이후 중앙사무의 지방이양이 명목상 수천건에 달하지만 재정이 따라주지 않으니 허상에 불과하다. 중앙정부 재정의 최소 몇 %를 지방에 주도록 고정해야 한다.” 성경륭 균형발전위원장도 “균형발전과 지역혁신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양여금은 중앙정부의 논리이고 지방 수요자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마무리발언에서 강력하게 분권화, 지방화 방향을 제시했다. “중앙집권의 거대한 힘을 막으려면 새로운 비전 제시가 필요하다. 21세기는 분권, 민주화, 다양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난 30년간 균형발전 말만 했지 모든 정책이 실패했다. 반드시 중앙정부가 해야 하는 사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몽땅 지방에 준다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중앙정부는 기존의 일을 지방에 넘기고 새 일을 하자. 이 문제는 국가개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7월8일(화), 7월18일(금) 두번에 걸쳐 균형발전특별회계 토론을 했다. 이정호 교수와 기획예산처 박인철 실장이 발제하고 김동기 행자부 지방재정국장이 강력한 양여금 옹호론을 폈다. 교부세, 국고보조금 사이 정치적 절충의 산물로 1991년 도입된 지방 양여금은 80%가 시·군에 배정된다. 김 국장은 “양여금을 폐지하고 교부세로 가면 시, 도, 대학 중심으로 흘러 기초 지자체와 지역 주민의 선호가 무시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임성일(지방행정연구원) 박사도 양여금을 옹호하면서 균형발전특별회계가 형평과 효율을 개선하는지 의문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반해 고영선(한국개발연구원) 박사는 “양여금 제도는 외국에는 없다. 학계에서는 ‘양여금은 언젠가 사라져야 한다’가 통설이다. 전국 도로는 거의 포화 상태이며 국도 바로 앞에 또 지방도로를 건설하는 사례도 있다. 1990년대 과도한 건설투자로 재정적자가 심해진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칸막이는 과거에 장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단점이다. 통합재정으로 가야 하고 교부세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양여금 폐지 교부세로 통합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정호 교수(균형발전위 비서관)는 “지방세를 만들어 재원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지역 간 격차가 너무 커 균형발전특별회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7월21일(월) 5시 재정분권 토론회에 김완주 전주시장, 김장준 인제군수, 김기태 국장(재경부), 고영선(한국개발연구원)·이영희(지방행정연구원)·김재진(조세연구원)·안종석(조세연구원) 박사와 배준구(경성대) 교수가 참석했다. 특별교부세는 대체로 반대가 많아 축소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균형발전특별회계는 찬성이 많았다. 김완주 전주시장은, “재정이 열악해 인건비도 못 주는 군이 많다. 교부세로 주면 지역개발이 저하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장준 인제군수는 “양여금은 지방 실정을 무시하고 너무 깊숙이 제한한다. 일괄 신청 후 배정하니 지자체로서는 일단 신청하고 보자는 식이다. 이 제도에 따라 예산 따오는 것이 지자체장의 능력 지표가 됐다. 소액사업들은 중앙기구 존치가 목적 아닌가 의심스럽다. 지방에 가는 돈을 늘이되 지방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
이런 일련의 회의를 거쳐 결국 행자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여금 폐지가 결정됐다(참여정부 천일야화 40화 예산개혁 1 참조). 그리고 균형발전특별회계가 신설됐다. 폐지된 양여금과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지역개발사업 자금을 모아 5조원 규모로 조성된 이 특별회계는 그 뒤 보수정부에서도 유지돼 현재 13조원 규모에 이른다.
그 뒤 균형발전위원회는 서울에 있던 공공기관 중 175개를 여러 지방에 분산배치하는 대역사를 해냈다. 직원, 노조, 언론,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줄기찬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이뤄낸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큰 개혁이었다. 노 대통령은 성경륭 위원장에게 “일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칭찬했는데, 내가 배석한 무수히 많은 보고 자리에서 정말 보기 드문 상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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