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명장 김진, 광어 양식인으로 인생 2모작중
국내 농구 명장을 언급할 때 김진(62‧186cm)은 빠질수 없는 이름중 하나다. 오랜시간 동안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거나 왕조를 만들어낸 감독은 아니지만 한번씩 짧고 굵게 확실한 성적을 만들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않고 매너도 좋은 편인지라 '코트의 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농구 인생을 보면 '불꽃 남자'라는 말도 잘 어울려 보인다.
누구보다도 승부욕이 강했고 거기에 맞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른바 공부하는 지도자였다. 그러한 노력이 정점에 달할때 우승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의 전성기라면 단연 대구 동양 오리온스 시절이다. 오리온스는 강호보다는 약체로서의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 32연패 치욕 등 하위권에서 멤돌던 시절이 많은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그러한 오리온스가 힘차게 도약하며 리그를 제패한 시절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김 전 감독과 함께 할 때다. 김감독은 데뷔 첫해였던 2001~02시즌 오리온스를 정규리그 1위에 올려놓은 것을 비롯 챔피언결정전까지 제패하며 통합우승의 영광을 만들어냈다. 일부에서는 ‘운이 좋았다’는 말로 저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당시 신인으로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천재 포인트가드 김승현 때문이다. 김승현은 KBL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신인왕과 정규시즌 MVP 동시 수상자다. 베스트5, 어시스트상, 스틸상까지 수상하며, 전무후무한 데뷔 시즌 5관왕을 달성했다. 그런 선수를 3순위로 지명했기에 완벽한 전력을 구축하며 우승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승에 요행수는 없다’는 말처럼 신인 한명 잘 들어왔다고 당장 그팀이 하위권에서 최강팀으로 거듭나지는 않는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김 전 감독은 원하던 선수를 뽑을 수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선수의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더불어 팀컬러에도 대대적으로 변화를 주며 우승할 수 있는 판을 제대로 세팅했다.
일단 당시는 외국인선수 2인출전제의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외국인선수 전력이 중요했다. 김감독은 비시즌부터 거기에 대한 꼼꼼한 정보분석에 들어갔다. 자유계약이 아닌 드래프트 시절이었지만 선수들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좋은 지명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뽑은 선수가 고 마르커스 힉스(1순위)와 라이언 페리맨(20순위)이었다.
힉스같은 경우 당초 크게 주목받지 않은 선수였지만 기동성과 운동능력이 좋은 젊은 선수라는 점에서 김승현과 호흡이 잘 맞을 것으로 판단하고 뽑았다. 마지막 순번에 지명한 페리맨 역시 '진흙 속의 진주'라는 평가가 나왔을 만큼 순번 대비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김승현과 힉스는 최고의 원투펀치로 리그를 휩쓸었고 페리맨 또한 언더사이즈 빅맨의 우려를 깨고 포스트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김진 매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통 2002년하면 대한민국 축구의 월드컵 4강을 꼽는 이들이 많겠지만 농구인들에게는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도 기억되는 해다. 당시 대한민국 농구국가대표팀은 20년 만에 만리장성을 넘어서 정상에 섰다. 한국 킬러로 악명높은 장신포워드 후웨이동 등 기존 강자들이 건재했고 거기에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된 야오밍까지 버티고 있었다.
객관적 전력상 대한민국팀이 당해내기 쉽지 않아 보였지만 김승현 막판 투입 등 김 전 감독이 짜놓은 기발한 전략이 속속 들어맞으며 엄청난 업셋을 만들어냈다. 김 전 감독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2013~14시즌 LG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챔피언결정전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바 있다.
그렇다면 김 전 감독은 현재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농구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겠지만 현재 그는 전혀 관계없는 업종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광어양식 일이 바로 그것이다. 김 전 감독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광어를 제일 잘 키우기로 소문난 대봉엘에프영어조합법인(비봉수산)에서 일하고 있다.
제주도에 위치하고 있는 대봉엘에프영어조합법인은 질병 없는 광어 특정병원체무감염(SPF) 종자 생산기술 개발 연구를 통해 종합 수산기업으로 도약 중인 회사다.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병원성 미생물(바이러스, 세균 및 기생충)이 없는 BAS의 원천기술을 발명해 상용화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어류용 배합사료 생산에 이어 넙치 특정병원체무감염(SPF) 종자생산 등 쉬지않고 기술개발에 힘쓰는 회사로도 알려져있다.
"2016~17시즌까지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고 이후 KBA이사, KBL 재정위원 등 행정일을 경험하기도 했죠. 이후 국가대표 사령탑에 뜻이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문득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내려온 곳이 이곳 제주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김 전 감독의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꼭 큰 곳에서만 발휘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 서울역 부근에서 '노숙인 한끼식사 나눔행사'봉사활동에 참여했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던 중 대봉엘에프영어조합법인과 인연이 닿았다. 일각에서는 해당 회사에서 임원으로 와달라는 일종의 제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무리 김 전 감독의 열정과 의지를 높이 샀다고 해도 수산 쪽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농구인을 대상으로 스카웃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제주도 수산업계 쪽에 오랜시간동안 기여하고 계십니다. 이쪽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시기도 하셨고요. 저는 현재 광어양식에 대한 품질 등 홍보마케팅과 사료회사 일을 하고 있어요. 대외적인 업무를 주로 맡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생물 키우는 것에 관심이 있던 편인지라 자연스럽게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무슨 파격적인 조건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니 오해들은 하지 마시고요. 그냥 배우면서 일할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농구 쪽은 전문가였겠지만 업종이 전혀 다른 수산업에서는 김 전 감독도 초보자였다. 유명인이라고, 나이가 있다고 특별대접을 바랄 수는 없었다. 농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김 전 감독 역시 불만없이 밑바닥 일부터 해나갔다.
"뭔가 대접을 원했다면 시작도 안했겠죠. 그냥 최소한의 몫을 하고 싶었습니다. 양식장 바닥청소부터 시작해 사료 급이 출하과정까지…, 동료분들이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수시로 일터를 찾아다니며 광어양식 현장 경험도 쌓았고요. 그렇게 3년 정도 하고나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오랜 시간 청춘을 바치신 분들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겠지만요. 꾸준히 하다보니 수산업의 중요성도 알 것 같고 애정도 커졌습니다. 서울 노량진수산시장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양식산업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농구에 대한 애정만큼은 여전하다. 최근에는 시간이 부족해 잘 찾아가고 있지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동중 농구부를 찾아가 아이들을 가르쳐주며 꾸준하게 재능기부를 해왔다. 도내 휠체어 농구대회에도 종종 참석하고 있다. 어디에 있던지간에 농구공이 있는 곳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천상 농구인이다.
”이곳에도 재능과 열정을 갖춘 아이들이 꽤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꿈을 이어갈 상급학교가 없다보니 도중에 꺾이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농구부가 있는 지역으로 가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옆 지방도 아니고 섬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가야하니까요.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몇몇이 육지로 가기도하지만 그것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지요. 어쨌거나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많이 배우고 생각하면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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