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엄마’가 아닙니다 [플랫]
‘엄마, 이리 와서 불고기 사세요!’ 갑자기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은 그의 말이 너무 당황스러워 잠깐 벙해 있다 살짝 옆으로 빠져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내 앞길을 막아선 것도, 두부를 사러 잠시 들른 마트에서 불고기를 내미는 것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성인 남성이 ‘엄마’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왜 나에게 엄마라고 불렀을까.
나도 아이의 선생님을 찾아뵙는 자리처럼 애초에 누군가의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참여할 때는 ‘어머님’ 같은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아무개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적이 없다. 이유식 거리나 어린이 장난감이라도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다면 모를까. 아직 아무것도 담지 않은 내 장바구니에는 나라는 사람과 엄마라는 호칭을 연결지을 어떤 단서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녁시간 누군가를 위해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다 어머니인 걸까.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다.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38.2%는 1인 가구다. 부부나 형제자매로만 이루어진 1세대 가구 또한 22.8%에 이른다. 그러니 마트에 있는 사람이 모두 엄마의 마음으로 물건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여서 장을 보러 나온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이 있는 사람이라 마트에 들어섰을 뿐이다. 장을 보는 여성은 곧 어머니라는 생각은 틀렸다.
마트가 강제한 규정인지, 개인이 선택한 어휘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혹시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 해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간혹 오래 알고 지내는 친구의 엄마에게 친근하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곰살맞은 사람들은 봐 왔지만 대뜸 처음 보는 사이에 엄마라니, 이건 친근함을 넘어 경계가 와장창 무너지는 느낌이다. 가족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끈끈하게 얽힌 공동체다. 한없이 푸근하고 충만한 믿음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원초적인 욕구들이 날것으로 부딪치는 지점이자,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하게 책임과 의무를 주고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그러니 가족이 많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고, 친해진다고 가족처럼 굴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마트에서 갑자기 얻은 1분짜리 아들은 반갑기보다 당혹스럽다. ‘엄마라는 이름이 갖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얼마나 큰데 제가 왜 그쪽한테 엄마죠?’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플랫]모두에게 코끼리미용실이 필요해
혹시 다른 호칭보다 어머니가 더 정중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날,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판매자와 소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의 예의는 그 관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였다.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서 정직하게 물건을 소개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상거래상 신의를 지키는 정도로 충분하다. 물건을 사는 대가로 그가 효심을 보이길 원치 않는데, 그가 마치 내 핏줄인 양 나를 부르는 호칭이 고맙기보다는 부담스럽다.
‘고객님’ 혹은 ‘손님’보다 더 특별하게 가깝거나 친근한 표현이 꼭 필요할까. 모든 상황에서 성인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엄마’는 적절한가.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만이 좋은 다가감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경계와 거리를 인정해야 그 사이에 존중이 자리 잡는다.
▼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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