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영화상]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작품상 '밀수'→김혜수 '엔딩크레딧'(종합)
[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중꺾그마(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정신으로 살아남은 한국 영화가 청룡영화상을 통해 의미 있는 피날레를 맞았다.
지난 24일 오후 8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홀에서 제44회 청룡영화상이 개최됐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영화 '밀수'가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조연상(조인성), 신인여우상(고민시), 음악상(장기하)까지 4관왕을 꿰차며 최다 수상으로 의미를 더했다.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밀수'는 올해 여름 텐트폴 첫 번째 작품으로 지난 7월 26일 개봉, 51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여름 영화 중 유일하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밀수판을 소재로 한 신선한 스토리, 김혜수·염정아를 주축으로 한 여성 서사 중심의 전개, 류승완 표 활극 액션 등 삼박자 균형을 고루 갖춘 완성형 블록버스터로 인정받으며 최우수작품상의 영예를 안았다.
'밀수'를 제작한 조성민 외유내강 부사장은 무대에 올라 "한국 영화에 위기가 많이 찾아왔다. 우리가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걸 보니 위기가 맞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반대로 생각하면 한 곳만 바라봤던 우리가 앞으로도 한눈팔지 말고 소중히 영화를 지켜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소감을 전하며 극장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전했다. 더불어 강혜정 대표는 "514만 관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쟁쟁한 영화들 사이에서 '밀수'가 큰 상을 받았다. 항상 관객분들이 기대하고 설레는 영화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감독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이 수상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생존이 걸린 극한의 상황 속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원초적이면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선사하며 한국형 디스토피아의 신기원을 열었다.
엄태화 감독은 "더운 여름에 겨울 영화 찍는데 고생하신 배우, 스태프와 이 영광을 같이 하고 싶다. 올해 결혼했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홍보한다고 자리를 비워 신혼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고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각본상은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2017년 이동 통신사 콜센터로 현장실습 갔다가 3개월 만에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19세 소녀 고(故) 홍수연 양의 실화를 바탕으로 '다음 소희'는 극심한 감정노동 실태와 열악한 업무 환경을 다룬 영화로 참혹한 현실에 큰 울림을 남겼다. 정주리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참담하고 슬펐다. 계속 반복되는 일이다"고 수상 소감을 대신했다.
배우상 면면도 화려하다. 남우주연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병헌이, 여우주연상은 '잠'의 정유미에게 수상의 영광이 전해졌다. '눈알을 갈아 끼운 연기력'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던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병헌은 친근한 이웃이자 아파트의 주민대표로 영화 전반을 이끌다가 결정적인 순간 섬뜩한 광기로 반전을 안기며 소름 돋는 연기의 정수를 보였다. 이병헌은 "다음 달 둘째가 태어난다. 태명은 버디다. 집에서 지켜보고 있을 이민정 씨, 아들 이준후, 그리고 둘째 버디까지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나이스 버디"라고 기뻐했다.
또 다른 광기의 열연을 펼친 '잠'의 정유미도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독식했다. 정유미는 '잠'을 통해 기존의 러블리한 매력을 잠시 내려놓고 공포에 잠식되어 가는 현실적인 인물로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정유미는 "나에게 영원한 미스김, 김혜수 선배를 10년 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배우를 했을지 모르겠다. 김혜수 선배와 이 상의 영광을 나누고 싶다"고 롤모델 김혜수를 향한 감사를 전했다.
박빙의 남우조연상은 '밀수'의 조인성이, 여우조연상은 '거미집'의 전여빈이 차지했다. '밀수'에서 밀수판을 접수한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조인성은 극 공기의 흐름까지 바꿔버리며 연기와 화려한 액션으로 올해 최고의 신 스틸러로 등극했다. 조인성은 "박정민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 상만큼은 정민이가 받길 원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이 작품을 하면서 나도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다.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고 같이 있어도 보고 싶고 마지막 헤어지는 날 많이 울었다. 나한테는 소중한 기억이었다"고 곱씹었다.
여우조연상 수상에 눈물을 쏟은 전여빈의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거미집'에서 어떤 위기와 장애물도 뚫고 가는 진격의 신미도로 텐션을 끌어올린 전여빈은 "'거미집'을 상징하는 신조어는 '중꺾그마'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믿음이 돼 실체가 없는 것이 실체가 될 수 있는 엔진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의 길을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면 믿어도 된다고 응원하고 싶다"고 밝혔다.
충무로의 미래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신인남우상과 신인여우상은 '화란'의 홍사빈과 '밀수'의 고민시가 수상했다. '화란'에서 지옥 같은 세상 속을 살아가는 소년 연규 그 자체가 된 홍사빈은 "이 상으로 생기는 행복감을 눌러 담아 겸손하게 연기에 임하겠다. 멋지고 낭만 있게 연기하겠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밀수'에서 다방 막내로 시작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군천 바닥의 정보를 꿰뚫은 정보통 고옥분으로 파격 변신한 고민시는 "'밀수'로 올 한해 처음 해보는 게 정말 많았던 소중한 작품이다. 항상 함께 한 해녀 언니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국내를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국가대표급' 명품 배우들도 청룡영화상 시상 무대로 총출동해 성대한 영화 잔치를 완성했다.
충무로 기대주로 등극한 노윤서는 '오징어 게임'을 통해 월드클래스로 자리매김한 배우이자 지난해 신인감독상 수상자로 화제를 모은 이정재 감독과 올해 신인감독상 시상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첫 시상식 무대임에도 긴장하지 않고 노련하게 시상을 이끌었다. 최다관객상 시상에 나선 '범죄도시' 시리즈의 주역들인 윤계상과 박지환의 재치 있는 시상도 화제였다. 특히 박지환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뉴진스 무대를 보고 싶었는데 또 못 봤다"며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단편영화상 시상에 나선 '무빙'의 '봉석(이정하)-강훈(김도훈)' 케미도 상당했다. 첫 시상에 나선 이정하는 '무빙'의 고공 능력을 떠올리며 "지금 너무 떨려서 하늘로 날아갈 거 같다"며 김도훈에게 도움을 청한 것. 객석에 앉은 선배들 또한 두 사람의 귀여운 재치에 '이모, 삼촌 미소'를 지었다. 감독상 시상에 나선 조진웅은 무거운 한지민의 드레스 자락을 함께 잡아주며 등장해 웃음을 선사, 배려 끝판왕 면모를 드러냈고 '백설공주의 인간화'로 박해일의 감탄을 이끈 윤아의 아름다운 비주얼과 유려한 시상 진행도 눈길을 끌었다. '아시아 스타' 탕웨이와 함께 '원더랜드'를 이끈 박보검의 만남도 반가움을 전했다.
무엇보다 이날 시상 하이라이트를 맡은 이성민은 "청룡영화상 1부를 집에서 보다가 시상하러 왔다. 마치 TV에 들어온 느낌처럼 현실감이 없다. 여기 내 아들들이 많다. 홍사빈, 박정민, 도경수가 (작품에서) 내 아들이었다. 나에게 총을 겨눈 분도 있고 칼을 겨눈 분도 있다. 손자도 있는데 손자 도준(송중기)이가 미래에 다녀와 수상자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며 차진 입담으로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스페셜한 무대도 이어졌다. 1993년 청룡영화상 MC를 시작으로 1998년(심혜진 사회)을 제외, 이날 열린 제44회 청룡영화상까지 무려 30번째 진행을 맡게 된 '청룡의 여신' 김혜수의 아듀 무대도 이목을 끌었다. 오직 김혜수의 마지막 청룡영화상 무대를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정우성이 깜짝 등장한 것. 정우성은 "김혜수가 영화인들에게 주었던 응원, 영화인들이 김혜수를 통해 얻었던 위로와 지지. 영화인들을 향한 김혜수의 뜨거운 애정이 있었기에 청룡영화상이 있을 수 있었다"고 영화인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혜수는 "지난 시간 후회 없이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청룡영화상과 인연이 30년이나 됐는데 이제 매년 연말 생방송을 앞두고 가졌던 부담을 내려놓고 22살 이후로 처음 맞이할, 시상식 없는 연말을 맞이할 김혜수도 따뜻하게 바라봐 주길 바란다"고 마지막 코멘트를 덧붙였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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