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전쟁… 우크라 덮친 두 번째 겨울, 전후방 없는 공습 공포

키이우/김신영 기자 2023. 11. 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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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공습, 키이우 현장… 김신영 국제부장 르포
25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공습 경보가 발령된 가운데 사람들이 흐레샤티크 지하철역에 대피해 있다./AFP 연합뉴스

“신속히 방공호로 이동하십시오. 자만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신속히 방공호로 이동하십시오.” 26일 0시를 조금 넘긴 시간, 야간 통행금지 실시로 고요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일대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물병과 담요를 챙겨 호텔 지하 2층 주차장에 설치된 어둑한 방공호로 내려가자 싸늘한 공기 가운데 불안한 눈빛의 투숙객들이 숨을 죽이고 모여 있었다. 경보는 세 시간이 지난 오전 3시에야 풀렸다. 이날 오후 2시와 전일 오전 3시에도 공습 경보가 발령됐다. 키이우의 비정부단체 ‘공익 저널리즘 랩(PIJL)’에서 일하는 류바 크노로조크씨는 “러시아와 전면전에서 두 번째 겨울이 드디어 닥쳤음을 알리는 신호”라며 “그들은 전력과 에너지를 끊어 도시 전체에 타격을 주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국

잇단 경보는 러시아가 키이우에 대한 사상 최대 드론(무인기) 공격을 단행하면서 발령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5일 새벽 러시아가 총 75대 드론으로 키이우를 공격했고 우크라이나군이 이 중 74대를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66대는 키이우와 인근 지역, 나머지는 이보다 먼 지역에서 격추됐다. 키이우 시민들은 미사일에 비해 값싸고 조작이 쉬운 드론이 최근 전쟁의 주요 수단으로 부상한 데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있다. 전방과 멀리 떨어진 수도에 드론이 수시로 날아들면 시민 전체가 공격 반경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심가에 있는 김신영 국제부장.

지난 25일 도착한 키이우의 거리는 겉으론 연말을 맞은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름난 식당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고 백화점엔 성탄 장식이 반짝였다. 여름에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동부와 남부 전선(戰線)의 교착 상태로 돌입한 가운데 키이우가 전쟁과 다소 멀어졌다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틀 동안 이어진 공습 경보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무더기 드론 공격으로 도시는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25일 경보는 드론이 수도를 향해 밤새, 천천히 날아들고 우크라이나군이 이를 격추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6시간이 지나서야 풀렸다. 이들 드론은 폭탄을 탑재하진 않았지만 그 자체가 건물을 파괴하거나 인명 피해를 입힐 수 있고 여느 집 창문에 무작위로 날아들 수 있어 일반 시민에겐 더 큰 공포를 유발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6·25 전쟁과 같은 과거의 전투는 고지 등 전선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선 구분 없이 후방에도 무차별 공습이 이어지고 있다.

25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민들이 1932~33년 대기근(홀로도모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가 무더기 드론 공격에 나선 날 밤 키이우엔 건물 창문마다 빨간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이날은 구(舊)소련 스탈린 정권의 대표적 폭정 중 하나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1933) 추모일로 무고한 희생자를 기억하고 러시아에 점령당했던 비참한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밝히는 촛불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굶어 죽음)’라고 부르는 이 참사는 소련의 집단농장 체제에 반발하는 우크라이나를 탄압하려고, 이 지역에서 생산하거나 저장된 곡물을 몰수해 약 300만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은 과거의 범죄에 대한 응징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다짐하는 기념일을 기해 러시아가 고의로 우크라이나 수도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단행했음을 암시한다.

키이우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 중 상당수는 이틀 동안 이어진 긴 공습경보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이들은 지난달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국제 사회의 관심이 쏠려 이처럼 여전히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잊힌 전쟁’이 될까 우려했다. 그러면서 최대 지원국인 미국의 의회에서 추가 지원 회의론이 대두되고 유럽 서방국을 중심으로 양국이 협상을 통해 잠정 휴전에 돌입하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도 경계했다. 앞서 지난 24일 독일 일간 빌트는 미국과 독일이 막후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휴전 협상을 하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계획은 우크라이나가 더 이상 영토를 빼앗기지 않도록 보장하는 대신 러시아가 이미 점령한 영토는 그대로 ‘현상 유지’하게 하자는 내용을 담았다고 알려졌다.

'우크라 대기근' 91주년 추모하는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 - 25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1933) 91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오른쪽 둘째) 대통령과 올레나 젤렌스카(오른쪽 셋째) 여사가 장병들과 함께 추모상 앞에 촛불을 놓고 있다. /로이터 뉴스1

26일 키이우에서 만난 교사 이리나 두바스씨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안다면 그들과 협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 점령지이자 지난 6월 댐 파괴로 큰 피해를 본 헤르손주 노바 카호우카에서 지난해 11월 키이우로 피난했다. 그는 러시아 점령 후 러시아어로 가르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잡혀갔고 수일간 협박을 받은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살던 집에서 비참하게 쫓겨나 수복 즉시 돌아가길 고대하는 우리에게 (현상 유지를 위한) 협상은 선택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전쟁 발발 후 자원 입대해 ‘공개할 수 없는 남부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고 있다는 비탈리 쿠즈멘코씨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침공이 아무 응징 없이 마무리되어선 안 된다”며 “그렇다면 이 비극은 우크라이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시위대 100여 명이 진압 과정에 목숨을 잃은 2013년 우크라이나 민주화 시위(’광장혁명’)에 참여했다가 구타와 감금을 당했던 그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 자원 입대했고, 지난해 전면전이 발발하자 다시 입대했다. 그는 “10년전 우리는 러시아와 같은 전체주의 나라가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우선하는 나라가 되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이미 이란과 중국제 드론을 공급받아 우리를 공격하고 전장에선 북한산 무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룰(규칙)을 어기는 나라들의 횡포를 그대로 둔다면 이들 전체주의 국가는 더 강해지고 더 결속할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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