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퇴직하면 가장 아쉬운 직장 복지[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재취업, 비용 부담에 뒷전으로 밀리는 건강
아프면 퇴직 후 재기 기회도 사라져
국가검진 등 이용, 주기적으로 건강 챙겨야
하늘이 유독 맑은 날이었다. 초여름이긴 해도 바람이 시원해 활동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아끼는 후배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까지 설렜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약속 전날 받은 후배의 메시지였다. 애초 하기로 했던 식사보다는 가벼운 차가 좋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읽으면서 혹시 급한 일이 생겼는지 신경 쓰였다.
“선배, 저 한동안 못 뵐 것 같아요.” 후배가 헤어지기 직전에 내게 말했다. 나는 여행이라도 가나 보다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여간 잘 지내고 계세요. 건강 챙기시고….” 질문에 벗어난 대답을 하면서 후배가 차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순간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 문을 열려다 말고 후배를 향해 대체 무슨 사정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 잠시 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각지도 못한 후배의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후배는 한 주 전 집 근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했다. 회사를 나온 후에는 건강검진을 받은 일이 없어, 마지막 검진을 한 지 5년이 넘은 상태라 말했다. 그런데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며 그다음 날 대학병원에 진료를 보러 가는데, 어쩌면 장기간 입원을 할 수도 있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식사보다는 차나 하자던 후배의 말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어찌 그 지경까지 놔두었냐는 내 질문에 후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는 게 먼저였네요.” 후배는 회사를 나온 이후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재취업을 했는데 1년을 못 다녔어요. 또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지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슴 졸이며 지냈을 후배의 모습이 그려졌다. 두 번의 재취업과 퇴사, 그리고 세 종류의 아르바이트까지, 나였어도 그사이 건강검진까지 신경 쓸 여력이 도저히 없었을 것 같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내가 제대로 된 위로를 하고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 잘될 거라 말하고, 돌아오는 내내 쾌유를 비는 것 외엔 달리 해줄 일이 없었다.
건강검진, 직장인 시절에는 의무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다. 가을 무렵이 되면 관련 부서를 통해 기한 내 검진을 끝내라는 재촉을 여러 차례 받았고, 일정을 확인해 가며 병원을 예약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검진을 거른 적이 없었다. 몸에 이상이 있어도 추가 검사를 통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내 노력과 상관없이 회사가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어느 정도 건강은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고마운 줄 몰랐다. 간혹은 잦은 메일이 귀찮기도 했고, 검진을 마치는 것에만 급급해서 지켜야 하는 수칙들을 거르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라 건강을 자신했던 탓인지, 건강검진은 늘 귀찮은 것, 해야만 해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나오자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직장 건강검진이야말로 퇴직 후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복지 혜택이었다. 회사에서 떠밀리듯 나오니 온통 어찌 살지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내 건강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랴. 이전보다 팍팍한 형편에 검진 비용이 부담돼서, 그 가운데 내 몸 챙기는 일이 주변 눈치 보여서, 차라리 모르면 속 편한 병을 쓸데없이 알게 될까 봐 겁이 나서 등등 건강검진을 제때 챙기지 못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여기에 국가 건강검진이라는 제도를 직접 활용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언제 검진을 받을 수 있을지부터 시작해서 기본 항목은 무엇인지, 어떤 부분을 더 추가해야 빠지는 게 없는지 일일이 따져보기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결국, 현실의 장벽이 진단 시기를 늦추어 상태를 악화시키고 병원비 부담까지 키우는 악순환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회사를 그만두고 여유가 적어진 상태에서 검진받을 의무까지 없어지니 설령 건강이 걱정되어도 외면하기 쉬운 것이 퇴직자의 현실이었다.
두 번째 삶의 여정은 멀고도 험하다. 그 가운데 많은 퇴직자가 또 한 번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내 몸 돌보기란 어쩌면 부담이고 때로는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프면 사랑스러운 가족들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이루려던 목표를 눈앞에 두고 좌절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회사를 떠난 퇴직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건강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최우선 순위로 정해 놓고 이를 챙겨 가는 일이다. 과하게 돌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주기적인 건강검진을 통해서 병을 악화시키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지금까지 회사가 나를 관리해 주었다면 앞으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퇴직 후 두 번째 성공을 바란다면, 그 첫 조각은 건강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여름 이후 나는 아직 후배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메시지만 주고받을 뿐,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후배는 첫 수술 후 장시간의 외출은 불가능한 몸 상태로 지내고 있으며, 조만간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더 멋진 두 번째 삶을 꿈꾸고 노력하던 후배는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완쾌하여 다시 달려 나갈 후배의 모습을 기다려 본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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